31화

나라 잃은 설움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 때부턴가 ‘조선족’이란 말은 약간의 서늘함을 머금은 단어가 됐습니다. 흉측한 사건이나 불미스런 현장에서 그들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 등도 한 몫을 단단히 했죠. 하지만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조선족이란 말은 어떤 위험한 부류를 일컫는 게 아닌, 단지 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지칭한단 사실을 말입니다.

 

(사진:GOLFX/Shutterstock.com)
(사진:GOLFX/Shutterstock.com)

 

  

china101-their

그들의 시선 

 

 “왜 너희 한국 사람들은 우릴 조선족이라 부르는 거야? 같은 동포인데 말이야….”

 

중국에서 업무차 마주하는 분들 중에는 조선족 출신의 지인들이 상당합니다. 중국어를 아무리 능숙하게 하는 한국인이라고 해도, 중국 관습을 조선족 출신보다 잘 알기는 어려운 탓에, 상당수 업체에서 이들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석에서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나니, 조선족 출신 지인 중 한 분이 필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일본‧미국에 사는 한인 2~3세를 지칭할 땐 재일‧재미 교포 같은 단어를 쓰면서, 오로지 중국에 사는 동포만 재중 교포가 아니라, 조선족이라 칭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의 소견에 의하면, ‘차오씨엔주’(朝鮮族, 조선족)란 말은 본래 중국 인구의 90%에 달하는 한족이 자신들을 소수 민족이라고 조롱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교포’, ‘동포’ 등의 따뜻한 단어 대신 ‘조선족’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조선족 출신 중 상당수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조국을 ‘한국’이라 여기지 않고, ‘자신은 중국인’이라 자칭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10~20대 조선족 출신 젊은이들은 한국과 중국의 축구 경기에서 ‘중국’을 가리켜 ‘우리나라’로 지칭, 응원해오고 있다는 것을 필자 역시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필자의 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국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우리는 일제 치하 때 강제로, 또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터를 잡아야 했던 할아버지 때의 상황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필자 스스로 부끄러운 민낯을 본 것 같아, 낮술이 고픈 날이었습니다.

 

(사진:Jay Yuan/shutterstock.com)
(사진:Jay Yuan/shutterstock.com)

 

 

china101-her

그녀의 시선

 

필자에게 서운한 마음을 토로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족 3세 청년입니다. 그는 우리 언어로 말하고, 우리글을 쓰고, 우리와 같은 한식을 주식으로 먹습니다.

 

그런 그가 여전히 우리에겐 ‘조선족’일 뿐입니다. 만약에 그가 우리말로 소통하지 못하는 처지의 재미 교포 3세였다면, 우린 그는 ‘교포’ 또는 ‘동포’라 지칭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의 민낯을 마주했던 또 다른 사건이 있습니다.

 

최근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长沙市)로 출장을 다녀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후난성 창사 카이푸취(开福区) 연승가 남목청 6호에는 과거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던 임시정부 청사 자리가 보존돼 있습니다.

 

이곳은 지난 2007년 6월 중국 정부에 의해 복구됐으며, 2009년에는 해당 건물의 일부를 재복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기념관으로 조성했죠. 현재 청사 내에서 무료로 배포되는 한글 안내서는 서경덕 교수와 배우 송혜교가 지난 4월 기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은 한국인들은 속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를 찬양하는 문구가 청사 내 곳곳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1500_img00003

1500_img00004

1500_img00005

1500_img00006

남목청 청사 건물 내‧외부 전경이 담긴 홍보 판넬의 모습.

 

조선의 독립운동 기지였던 임시정부 청사에 중국 인민의 아버지라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당시 해당 지역의 우두머리였던 당 간부 등의 사진이 걸려있고, 홍보 영상 곳곳에 이들이 독립운동세력에게 도움을 줬던 기록들이 보란 듯이 진열돼 있는 것이죠.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 되는 문구는 단연, ‘김구는 창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였다’라는 내용을 담은 홍보 문구입니다. 이를 목격한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당시 도피를 거듭해야 했던 독립운동 중 창사 생활에 ‘만족했다’는 표현을 두고, 현재의 임시정부 청사 운영을 돕고 있는 중국 정부의 홍보를 위한 문구가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된 상황입니다.

 

더욱이 해당 청사 곳곳에는 ‘독립운동 당시와 현재에 임시정부 청사가 운영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중국 정부의 지원 정책 덕분’이라는 인상을 주는 홍보 문구가 게재돼 있습니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국 본토를 침략하자, 중국 정부는 11월 수도를 중경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창사로 이전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돼있는 문구는 마치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전과 운영 일체가 중국 정부의 결정에 종속된 객체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한국 국민당은 중국 국민당 군부 조직인 여지사로부터 매월 2,500원을 지급받았다’, ‘1932년 9월부터 1941년까지 김구에게 별도로 매월 5,000원을 지원하였다’,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100여 명도 중국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창사에 도착했다’, ‘대한민구임시정부는 창사에서 활동하는 동안 중국 정부와 후난성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조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적은 문구가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남목청 청사에 중국 정부 인사 소개된 홍보 판넬의 모습.
남목청 청사에 중국 정부 인사 소개된 홍보 판넬의 모습.

 

입장료를 지불하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는 영상물도 마찬가집니다. 김구, 현익철, 유동열, 지청천 등의 열사들에 대한 소개나 독립운동의 어려움을 담은 내용에 앞서 당시 중국 정부에서 활동했던 후난성 창사 주석 장즈중(張治中) 등에 의한 후원 사항이 상세하게 방영되고 있죠.

 

과거 일제 치하 속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했던 열사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찾는 한국인의 시각에선, 뜬금없는 중국 정부의 홍보가 마뜩잖게 보일 수밖에 없죠. 실제로 그 내용에 크게 실망하고 돌아가는 한국 관람객들도 많습니다.

 

내용상의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이 지역 일대는 중국 정부로부터 부동산 개발 특구로 지정, 청사 건물을 제외한 지역 골목 일대가 모두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실제로 지난 10월 4일 이 곳을 방문했을 당시 청사를 제외, 청사 주위를 둘러싼 건물 입주민 전원이 이미 각 거주지에서 이전한 상태로, ‘부동산 개발 지역구, 거주민 1000호 이전 완료’라는 붉은 경고문만 부착돼 흉물스런 상태로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과연 이런 곳에 임시정부청사가 보존돼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죠.

 

 

1500_img00009

1500_img00010

1500_img00011

1500_img00012

남청목 청사가 들어선 골목과 인근 도로의 모습. 정면의 건물 전체가 비어있는 상태다. 

 

이 일대에 대한 대규모 개발 정책은 지난 2012년 중국 정부가 후난성 창사와 우한(武漢), 정저우(鄭州), 허페이(合肥), 난창(南昌), 타이위안(太原) 등 각 중부 6개 성의 성도를 통과하는 9356㎞에 달하는 고속철도 연결을 추진, 창사 지역 일대가 초대형 도시권 형성 지역구로 개발되면서 시작됐습니다.

 

때문에 최근 창사시를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크게 들썩이며, 초대형 아파트 건축 붐이 일고 있습니다. 실제로 임시정부청사가 자리한 창사 역세권의 부동산 시가는 지난 2년 사이 크게 뛰어 평당 1만 위안(약 2천만 원)을 웃돌고 있으며, 향후 수년간 이 같은 시가 상승은 계속될 것이라는 이 지역 부동산 전문가들의 일관된 분석입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임시정부 청사 역시 해당 부동산 정책에 따라 또다시 이전되는 위기에 놓인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앞서 일제 치하 시기 임시정부는 상하이, 난징, 전지앙에서 창사로, 이후 또 다시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으로 수차례 이전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지금 임시정부 청사의 처지와 매우 유사하죠. 마치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녀야 했던 우리 민족의 설움이 수 십 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사진:제인 린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SHARE :

시리즈 소개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필자 소개

서울에서 중앙일간지 정치부 국회출입기자로 4년 여간 활동, 서른을 한 해 앞둔 무렵, 아무 연고도 없는 베이징으로 무작정 건너와 현재는 프리랜서 통·번역, 여행 칼럼을 쓰며 자유로운 삶을 만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