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단풍 없는 단풍촌에서

(사진:Anna Semenova/shutter.com)
(사진:Anna Semenova/shutter.com)

 

거의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부터요.

 

그때,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방황하던 비실비실한 고등학생이었고, 당신 역시 당신 나름의 방황을 일삼던 스무 살 남짓한 대학생이었지요. 가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희한한 마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데도, 떡하니 ‘관광지’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니까요. 그토록 흔한 맛집 하나 없고, 역사적으로 뜻깊은 유적지도 없습니다. 다만 징그럽다 싶을 정도로 많은 단풍나무 덕에, 때문에 가을이면 온 마을을 뒤덮는 단풍잎들 덕에 관광지로 그럭저럭 유명한 곳이지요.

 

나는 덜컹거리는 기차 좌석에 앉아, 다시금 십 년이 다 되어가는 그 날을 추억해봅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룬 10월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마음에는 이상한 바람 같은 것이 불어 좀처럼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고,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마침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해서 수중에 돈이 조금 있었고, 나는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습니다. 아니, 사실 딱히 행선지는 없었습니다, 내린 곳이 그곳일 뿐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시력이 닿는 저 끝까지 단풍잎의 노랗고 붉은빛이 빽빽했으니까요. 작은 기차역의 주변으로는 배낭을 멘 여행객들이 바글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이 중년 이상이었으므로, 나는 ‘역시 나처럼 땡땡이를 친 사람은 또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세상은 온통 노랗고 붉었기 때문에, 남색 윈드브레이커와 청바지를 입고 있던 나는 더욱더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을엔 온통 단풍, 단풍……. 단풍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심지어 찻집의 이름도 ‘카페 드 메이플’, 한식당의 이름도 ‘낙엽기와’였으니까요. 나는 역 주변에 보이는 고깃집에 들어가 혼자 고기를 구워 먹었습니다. 고깃집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고기를 사 먹는다니, 왠지 웃겼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혼자 고기를 먹어보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리고 그때 당신을 만난 겁니다. 나의 앞에 남은 고기조각이 두 점쯤 남아있을 때, 당신은 식당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와 나처럼 일인분의 고기를 주문했습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남은 고기를 조금 더 천천히 먹고 싶어졌고, 이윽고 그것들을 다 먹고 나서도 괜히 탄산음료를 추가로 주문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을 때, 나 역시도 당신을 따라 식당을 나섰고, 우리는 자연스레 좁고 긴 단풍 길을 함께 걷게 되었습니다. 나란히도 아니고 일자도 아닌, 애매한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여행 오셨나 봐요? 대학생? 나도 대학생인데.”

 

당신은 돌연 고개를 돌려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처음 보는 대학생 누나’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긴장감에 얼굴을 붉혔습니다. 그 순간 흐드러진 붉은 잎사귀들이 유독 친숙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나 역시 홀로 여행을 떠나온 대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무슨 전공이시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문과’에 다니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나는 당신이 웃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지만요.

 

우리는 일직선 모양으로 걸으며 대화를 나누다 곧 나란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눴지요. 여행을 떠나온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각자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서, 심지어 자신을 떠나갔던 사랑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어느 정도 깊숙이 있는 것들까지 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개운했습니다. 우리는 단풍 길에서의 대화를 통해 공통적으로 어떤 좋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존재들과 조금 다를 뿐, 틀린 존재는 아니라는 것.

 

어찌 됐건 그 마을로 도망을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회 부적응자니 적절하지 못한 구성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단풍 길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하늘로 향하는 시야가 탁 트일 때쯤, 우리 둘은 어느새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낯 뜨겁지만, 나는 이런 게 바로 ‘가을의 마법’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행이라는 것에는 언젠가 반드시 끝도 따르는 법이라서, 우리는 작은 기차역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영영 안녕을 말하기는 싫었고, 그것은 당신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다음 해 단풍이 절정일 때, 그러니까 그 마을의 단풍 축제가 열릴 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흔한 겉치레 식의 작별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내게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해에 기적처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몇 번쯤 입맞춤도 나눴습니다. 다음 해에도, 그러니까 내가 ‘문과’를 전공하는 가짜 대학생이 아닌 진짜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우리는 가을이면 그 마을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가을 연인’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추억 속에서 한창 허우적대고 있을 때, 돌연 기차의 덜컹거림이 잦아듦을 느꼈습니다. 마을에 도착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추억에서 깨어난 오늘날의 나는 시선을 객실의 바닥에 고정시킨 채로 걸어 나와, 긴장 섞인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만 이곳은 더는 내가 알던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단풍이 절정이었던 수년간의 추억이 휘발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을이 아닌 한겨울에 이곳을 찾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작은 기차역의 주변으로 복작대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유독 트여 보이고 탁하게 보이는 하늘뿐, 단풍도 인파도 없는 마을은 너무도 적막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온통 앙상한 가지뿐.

 

카페 드 메이플과 낙엽기와의 철문들 역시 굳게 닫혀있어, 나는 마치 유령의 마을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희끗희끗 긴 수염이 난 어르신에게 ‘혹시 이 마을이 망해버렸나요?’ 물었습니다.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어르신은 친절하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이 마을은 가을에만 반짝 살아나는 곳이야. 가을이 지나가고 단풍이 사라지면 모든 가게가, 하물며 사람조차 자취를 감추는 곳이지. 한겨울에 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헛걸음했구먼그래.”

 

그 흔한 찻집 하나 연 곳이 없어, 나는 자판기의 싸구려 커피를 손에 든 채로 역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손에 든 커피가 식는 동안 사람을 태우지 않은 기차 몇 대가 형식적으로 멈췄다 떠나가기를 반복했습니다. 나는 새삼스러운 추위를 느꼈습니다.

 

3년 전쯤부터였을까요, 단풍촌의 단풍축제 일정에 맞춰 이곳을 찾아도 당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갔었던 식당에서, 맨 처음 당신을 만난 그때처럼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당신과 걸었던 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고로쇠 약수를 끓이는 달달한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했지만, 전혀 달콤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화번호라거나 집 주소라도 알아둘 걸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과거의 우리는 적당히 신비롭고도 그렇게 두세 해가 흘렀습니다.

 

잘 지내고 계실까요, 나는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어엿한 청년이 됐습니다. 얼굴 역시 조금 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워서 이 먼 곳까지 한번 와봤노라고. 철이 들고도 남았을 나이가 됐지만, 나는 여전히 가을이면 열여덟 고등학생이 되곤 한다고. 그때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외로움에 떨다 죽어버렸거나, 옳지 못한 길로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마웠다고, 나에겐 참 소중한 존재이셨다고요.

 

가을이면 마주치던 사람, 나는 한겨울에 가을의 단풍촌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당신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년의 가을에도 기차를 타고, 꾸역꾸역 이곳에 찾아올 생각입니다. 지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뜨거워져,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지고 있고, 언젠간 ‘가을이라는 계절’은 사라질 테지요. 그렇지만 가을은 여태껏 이곳에 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가을이 돌아오는 한 이곳에 돌아올 것입니다.

 

가을이 올 때까지 다시 잘 지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가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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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짧은 글을 씁니다. 짧은 글들 중에선 비교적 긴 글도 씁니다. 세상의 아직 보지 못한 풍경들을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또 그곳에서 일어날법한 이야기를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