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가 늘고 있다. 통계청이 집계한 1인 가구 수는 506만. TV에는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평범하지만은 않은 일상이 등장하고, 혼밥, 혼술은 흔한 용어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혼자가 버거운 사람들이 있다. 혼자보다 여럿이 가능한 일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한다. 혼자 먹고, 혼자 놀고, 혼자 즐기는 일을. 선뜻 내지 못했던 용기어린 도전이자, 대리만족이며, 불친절하지만 세심한 가이드다. 그리고 혼자서도 꿋꿋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록이다.
야간 관람이 아니어도 좋아. 봄날의 고궁을 거닐어보자, 혼자서.
과거 인물과의 무전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던 드라마 <시그널>처럼, 과거의 나와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생긴다면 나는 2009년의 나에게 외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발 그 해 한국 시리즈는 보지말라고. 그 날의 시합 때문에 호환마다보다 더 무섭고 징한 야구가 너의 인생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중독의 씨앗
‘2009 CJ마구마구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KIA타이거즈의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짜릿한 명승부였다. SK와이번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는데, KIA타이거즈가 마지막 9회말에 끝내기 역전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하며 KIA팬들을 울음바다 속으로 몰아넣었다. KIA는 이 승리로 전신 해태타이거즈 9회 우승에 이어 12년 만에 통산 10회 우승을 달성했지만 그 이후부턴 거짓말 같은 내리막길을 걸으며 지난해까지 하위권에 머물렀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고 징한 야구의 시작점
그러나,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더라.
(별다른 무전이 없었기에…)나는 결국 2009년 마약과도 같은 야구를 보고야 말았고, 매년 고통을 당하고 있다.
휴. 2009 한국시리즈 안 본 눈 삽니다.
그리고,
올해도 야구는 벚꽃과 함께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난 해에도 매일 야구장 혹은 TV앞에 앉아 야구를 보면서 다시는 야구 보지 않겠다, 내년에는 기필코 야구를 끊겠다고 다짐해왔지만. 2016년 일정이 공개되자마자 내팀 잠실 원정 스케쥴을 달력에 빨간 글씨로 체크하고 있었다. 이게 웬일. 4월 내내 잠실 원정이 한 번 도 없다. 개막전이라도 홈에서 열리면 주말 여행을 겸해 다녀올 텐데 무려 마산에서. 털썩. 테임즈 너무 무섭고요. 내 팀은 개막부터 질게 뻔하고요.
야구 끊기는 생각도 한 적 없다는 듯 일정을 맘에 안 들게 짠 크보(야구팬들이 한국야구위원회(KBO)를 부르는 포현. 보통 접두어 ‘개’를 붙인다)를 욕하며 야구 볼 날을 소망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올 시즌 화제의 중심 한화이글스 팬이다.
너 잠실 개막 시리즈 보러 안 갈래?
핵심은 겨우겨우 예매해놨더니 회사 일정상 못 가게 됐는데, 혹시 나라도 본다면 취소 안 하고 그 표를 내게 주겠다는 것이었다. 남 팀 야구를 왜 보나 싶어 단박에 거절하려 했지만, 겨울동안 심심했던 야구팬은 그렇게라도 야구가 보고 싶었다. 남 팀 야구라도 포스트 시즌 경기는 매년 직관하던 나 아닌가. 잠실 개막전이라면 야구팬들이 관심있게 지켜보는 빅 매치!! 게다가 가을야구 쉽게 못 가는 팀 사정상 볼 수 있을 때 자주 야구장 가자는게 내 지론.
그래, 어차피 올해도 못할 가을야구.
봄에 실컷 보자.
비록 남 팀 경기, 혼자서지만.
야구는 지하철에서 부터 시작된다.
처음에는 고민 좀 했지만, 막상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흥이 오르기 시작한다. 잠실까지 2호선을 타고 이동하는데 재미난 광경들을 볼 수 있다. 신도림을 즈음하면 '유광잠바'(엘지트윈스를 상징하는 의상이자 응원복)들이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하고 주황색 유니폼(한화이글스의 유니폼)도 눈에 띄기 시작한다. 사당에서는 본격적으로 야구팬들이 유입되고, 강남에서 일반 승객들이 빠져나가면 그땐 지하철 내에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약간 과장해서 30%쯤은 된다. 서로 말은 안하지만 은근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것.
그렇게 잠실 종합운동장에 도착하면 이제 본격 사람 구경이 시작된다. 현역 스타, 레전드 스타들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들을 구경하다보면 은근히 타팀 팬들도 곳곳에서 보인다. 내 눈앞에 베어스 잠바하나가 나타나더니 양현종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 하나가 쓱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스친다. 그럴 때면 이산가족을 만난 것보다 더 반가운 마음에 내적 친목을 쌓는다.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 사람 구경이 대강 끝나면 야구장의 꽃, 맥주와 치킨들을 사기 시작한다. 지난 시즌부터 야구장 내 맥주 캔 반입이 금지되면서 캔 맥주 특유의 청량한 맛을 즐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맥주는 언제나 옳다. 왠지 야구장에서 먹어줘야 하는 대형 홈런볼을 함께 사서 입장하면 야구를 위한 준비 완료.
혼자 봐도 참 재밌는 그깟 공놀이
야구가 시작되면 그때부터 야구장은 체감 기온 1도는 상승하기 시작한다. 응원소리가 내부에서 울리는 잠실 야구 경기장에서는 응원전 열기도 더 뜨겁다. 내 팀 경기였다면 나 역시 그 응원 열기에 동참했겠지만, 3자의 입장에서 관전하는 야구도 여유롭고 좋다. 자주 야구를 봐서 그런지 남 팀 응원가도 귀에 익었다. 흥얼흥얼 대며 먹는 맥주와 삼겹살, 3층 맨 꼭대기에서 관람하는 야구.
사실 야구장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탁 트인 시야 때문이다. 굳이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녹색 잔디와 저물어 가는 하늘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시원하다. 물론, 신선놀음하듯 야구장의 묘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승부에 초연할 수 있는 남 팀 경기이기 때문이겠지만.
휴대폰을 꺼내 내 팀 중계를 보니 예상대로 지고 있다. 화가 나서 맥주를 마시려 보니 페트 병 하나를 다 마셨다. 그 사이 지고 있던 홈팀은 차근차근 점수를 내 따라잡고 기어이 연장전을 치른다. 이러다 시즌 1호 1박2일 경기 치르는거 아냐, 싶었는데 홈팀의 끝내기 안타로 경기는 승부가 갈리고 만다. 경기장을 울리는 홈팀 팬들의 환호 소리를 뒤로 하고 어느덧 내게도 익숙해진 승리의 노래를 흥얼 거리며 나오는데, 내게 표를 준 한화팬에게 분노의 카톡이 오고 있다. 그깟 공놀이가 사람들을 들었다놨다 한다. 그래서 혼자봐도 야구는 참 재밌다.
혼자레벨
야구팬이라면?★
우리는 어차피 매일 혼자 야구를 즐긴다. 문자중계를 보면서, TV 앞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었다면 혼자 왔어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가까운 팬들이 있기에 혼자라도 편히 즐길 수 있다.
야구팬이 아니라면?★★★★
야구팬이 아니면서 야구장에 혼자 가겠다는 생각도 힘들겠지만, 혼자 무엇을 한다는 어려움보다 복잡한 야구 룰을 숙지하고 경기 자체를 즐기기가 어려운 일이다.
혼자TIP
혼자 야구보기의 가장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자리잡기다. 일단 야구팬이 아니라면 일찍 예매를 서둘러 응원석(잠실의 경우 3루 220 블록/1루 206 블록) 근처를 잡아보자. 가장 큰 노래방이라는 야구장에서 신나게 응원가 따라 부르다 보면 의외의 재미에 빠져들게 된다. 참고로 야구는 경기 2주전 예매 사이트(인터파크/티켓링크)를 통해 가능하다.야구팬이라면 좌석에는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 평소 응원석을 즐겨간다면 혼자 야구장에 갈 때는 내야 3층에서 여유롭게 야구를 즐기는 것도 좋다. 다만 잠실은 앞과 뒤 사이가 매우 좁으니 무조건 통로측 좌석으로 선점하자. 야구장엔 치맥? 피자? 다 먹어봤지만 삼겹살이 최고다. 입장할 때 주문해두면 바삭하게 구워 자르기까지 한 삼겹살을 내 자리까지 배달해준다. 치킨은 지하철 입구부터 미리 튀긴 닭을 들고 서있는 상인들이 많으니 취향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신천역 먹자골목에서 원하는 메뉴를 골라오는 것도 좋은 방법. 회와 맥주의 조합도 신선했다. 강추./사진: 황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