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대지에서 처음 만나는 옛 제국의 흔적: 멤논의 거상
죽음의 대지에서 처음 만나는 옛 제국의 흔적: 멤논의 거상
2016.04.27 16:03 by 곽민수

이집트의 도시들은 대부분 나일강을 따라 늘어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서안과 동안으로 나누어집니다. 룩소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차역이나 공항 같은 시설과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들 대부분은 모두 동안에 있고, 카르낙 신전이나 룩소르 신전 같이 유명한 유적지들도 동안에 있지만, 그렇다고 서안이 ‘별 볼일 없는 곳’은 또 아닙니다. 서안에도 많은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적어도 몇 번은 서안으로 가기 위하여 나일강을 건너야 합니다. 특히 죽은 자들의 영원한 안식처라고 할 수 있는 무덤과 장례신전들은 모두 다 태양이 지하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는 이 죽음의 대지(서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안에서 서안으로 건너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안과 서안을 계속해서 오가는 정기 운항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펠루카’라고 불리는 돛단배를 한 척 렌트하는 방법도 있지만 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정말로 국가에서 운영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 정기 운항선은 국립 페리(National Ferry)라는 당당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요금에 바가지를 씌우는 일도 거의 없는데, 요금은 한국돈으로 200-300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적용되는 가격이고 현지인들은 이 운임의 10분의 1 정도만을 내고 배를 이용합니다. 물론 300백원도 충분히 저렴한 가격인 만큼 현지인들이 내는 비용을 보며 굳이 약올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서안으로의 항해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에 이 여정에서 나일강을 여유롭게 즐길 수는 없습니다. 역시 나일강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조금 더 비싼 요금을 주고 펠루카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펠루카를 렌트하기 위해서는 이집트 특유의 지루하고, 또 심지어 가끔은 괴롭기까지한 가격 협상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멤논의 거상

서안의 선착장에서 내리게 되면 이집트 어디에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열정적인 호객행위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의 호객행위는 이곳 서안에서 이동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전거, 택시, 그리고 다시 동안으로 돌아가는 보트 등 주로 교통수단에 관한 것입니다. 무슨 교통수단을 선택하더라도 서안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고대의 유산은 ‘멤논의 거상’입니다. 아직은 주변에 푸른 풀빛이 남아 있는 전경 속에 고독하게 서 있는 이 거대한 석상은 ‘멤논의 거상’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 출신의 멤논(Memon)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인물인 멤논은 ‘여명의 여신’ 에오스(Eos)의 아들이었습니다. 멤논은 트로이편으로 참전하였지만 결국에는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아무튼 이 거상의 주인공은 멤논이 아니라 이집트 제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재위 기원전 1391-1353)입니다. 높이가 20미터, 무게가 700톤 이상에 이르는 이 거대한 한 쌍의 석상은 원래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례신전 제 1탑문 바로 앞에 서 있던 것입니다. 룩소르의 다른 신전들에서도 탑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석상들을 만나보실 수 있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신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거상만이 남아 있어 그 모습이 더 특별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각인됩니다. 석상은 어쩐지 생뚱맞은 공간에 위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거상은 신전의 부속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거상 뒷편에서는 계속해서 신전의 흔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룩소르 지역에서 만들어진 대형 석조물들은 대부분 룩소르 남쪽에 위치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석재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멤논의 거상은 특이하게도 룩소르의 북쪽인 카이로 근교의 헬리오폴리스 인근, 게벨 엘-아흐마르(Gebel el-Ahmar, 붉은산)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석재로 제작되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석재는 채석장에서 대충 석상의 모양으로 다듬어진 다음 배에 실려 북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힘으로 남쪽으로 옮겨졌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신전 앞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세세하게 조각되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상은 네메스(Nemes)를 쓰고 왕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파라오의 다리 옆에는 파라오보다는 훨씬 작은 크기로 두 명의 여인이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오른쪽 다리에 있는 것은 파라오의 어머니인 무트엠위야(Mutemwiya)이고 왼쪽 다리 옆에 서 있는 것은 왕비인 티예(Tiye)입니다. 파라오가 앉아있는 왕좌의 측면에는 파라오가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연꽃과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묶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상징은 파라오의 권위가 상하이집트 전체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거상은 기원전 27년 이집트 전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하여 심각한 균열이 생겼습니다. 이후 멤논 거상은 동틀녘 무렵부터 신비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상이 멤논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신비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 쯔음부터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기원전 30년 악티움 해전에서의 클레오파트라가 이끌던 이집트 함대가 로마 함대에게 패배한 이후, 이집트 영토 전체는 로마 황제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집트 전역에는 많은 로마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집트에 정착한 그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고대 이집트의 흔적들을 이해하며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새벽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비한 소리를 아들 멤논의 죽음을 슬퍼하며 흐느껴 울고 있는 여명의 여신 에오스의 울음소리라 생각하고,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에오스의 아들인 멤논의 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이야기꾼들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을 듯 합니다. 현대에 와서 다시금 조사해본 결과 석상이 내던 소리는 태양이 뜰 때에 발생하는 온도차에 의해서 석상 표면의 갈라짐 틈 사이에서 나오는 진동 소리로 밝혀졌습니다. 거상의 하단 부에 쓰여 있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낙서들은 오늘날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체로 거상이 내는 소리에 관한 사람들의 감상 같은 것들입니다.

역사적으로 거상이 내는 소리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130년경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기록된 것입니다. 재위 기간 내내 제국 전 지역을 시찰하며 돌아다닌 것으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는 이집트 방문 시 부인 사브리나와 함께 새벽녘에 들리는 거상의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한 거상의 울음소리는 200년 경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재위기에 거상을 보수한 이후에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오늘날에도 이른 새벽 거상을 찾아간다고 해도 소리를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새벽에 거상을 찾으실 필요는 없겠지요. 거상이 내는 신비한 소리를 더 이상 들어볼 수 없다는 사실도 참 아쉽기는 하지만, 이 멤논의 거상 앞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보다 거상 뒤에 있었을 거대한 아멘호테프 3세의 장례신전이 현재에는 완전한 폐허로 변해버려 이제는 그 모습을 짐작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투탕카멘의 할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가 통치하던 시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이집트가 풍요롭고 부강하던 시대였습니다. 굳이 전쟁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대의 이집트는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군사행동을 통해서 패권을 확인해야했던 람세스 2세의 시기와 비교해도 아멘호테프 3세의 이집트는 훨씬 더 부강해서 근동 지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패권을 잡고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위대했던 옛 제국의 영화도 지금 이곳에서는 살펴볼 길이 없고 말 없는 잡초들만이 오래된 폐허 속에서 바람결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진:곽민수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유적 기행이집트 연구가 곽민수 필자가 현장에서 직접 전하는 기억과 기록. ‘고고학자와 함께하는 이집트 유적 기행’은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집트의 매력을 소개하고, 현지 유적을 통해 5000년 전 역사속 세계로 초대한다.

필자소개
곽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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