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근처에 작은 단골 카페가 생겼다. 직접 로스팅한 세 가지 원두 중에서 손님이 원하는 종류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주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며칠 전 친구에게 그 카페를 소개해주며 마주 보고 앉아 따뜻한 카페라떼를 시켰다. 잠시후 하트 모양의 거품이 수놓인 라떼가 나왔고, 우유에서 풍기는 고소한 치즈 향이 농후한 커피의 맛과 조화를 이루었다. 치즈 향이라니.
해시태그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너무 많은 정보를 얻는다. 전혀 필요 없는 정보부터 면밀한 사생활까지. SNS뿐만이 아니다. 구글 검색창에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개인의 행동을 예측한다. 내가 검색하기도 전에 나에게 맞는 운동화를 추천하기도 하고, 파리 가는 비행기 한 번 예약했다고 프랑스에 있는 숙소들이 광고창에 수두룩 떠오르는 세상이다.
내가 쳐내려간 검색어와 내가 올리는 일상이 나를 감시하고 관찰한다. 2016년, 빅 브라더가 도래했다. 1949년 소설 <1984>를 통해 빅 브라더를 예언했던 조지 오웰은 선구자나 예언자였던 걸까?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빅 브라더는 이제 우리 현실을 잠식한다.
<1984>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를 보여준다. 가상의 세계인 오세아니아의 권력층은 허구적인 인물 빅 브라더를 내세워 독재를 일삼고, 체제 유지를 위해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헬리콥터, 그리고 ‘텔레스크린’이라 하는 장치를 이용해 사람들의 사생활을 감시한다.
영원히 늙지 않는 빅 브라더의 얼굴이 모든 건물에 벽에 걸려 펄럭거리고, 모든 행동과 소리들을 감지할 수 있는 쌍방향 송수신 장치 ‘텔레스크린’은 바깥뿐만 아니라 집 안까지도 들어와 시민들의 삶을 24시간 내내 감시한다. 과거의 역사는 끊임없이 조작되고 진실이 기록된 문서들은 모두 사라진다. 심지어 고독, 안정, 사랑 같은 추상적 감정들과 감각은 일체 부인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의 통제에 반발을 느끼고 저항한다. 그는 반정부 단체에 가입해 혁명을 꿈꾸지만 함정에 빠져 사상 경찰에게 체포된다. 고문과 세뇌를 이기지 못한 윈스턴은 사랑하는 연인까지 배신하고 당의 요구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상실한 채 빅 브라더를 받아들이고, 총살형을 기다린다.
공상 소설로 여기던 <1984>속 이야기는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원스턴의 저항은 정부의 정보 수집에 반대하는 현대 시민과 닮았고 오세아니아의 권력층은 정보화시대 정부와 비슷하다. 현대 정부는 범죄와 테러에 맞선다는 이름 아래서 디지털 발자국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인터넷 회선 감청을 사용하며 개개인의 통화, 이메일, 문자메세지를 손쉽게 들여다본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일시적인 안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다면 자유는 물론 안전도 누릴 수 없다”고 했다. 정부의 정보수집에 반대하던 현대인은 인터넷 속에 녹아든 보이지 않는 권력에 만족한 채 자유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