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분명히 신전의 출입을 통제하는 기능을 훌륭하게 했을 이 외국산 방어용 타워를 지나게 되면 우리는 아주 넓직한 공간에 이르게 됩니다. 폭 200미터, 길이 60미터에 이르는 이 넓은 공간은 신전의 앞마당(forecourt)입니다. 규모 자체도 굉장히 큰 공간이지만, 방어용 타워의 좁다란 문을 통과해서 나온 까닭인지 이 마당의 공간감은 실제의 넓이보다도 더 넓게 느껴집니다.
현재에는 자그마한 예배공간과 18왕조 시대의 소신전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거의 폐허로 보이기도 하지만 신전이 실제로 운영되던 당시에는 군사들이 머물던 병영과 행정 관청 등이 메우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눈을 지그시 감고 상상해보세요. 종종은 병사들의 땀냄새 속에서 분주하게 오고가는 관료들과 신관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돕는 많은 숫자의 하인들, 이러한 상상은 이제는 겨우 흔적만 남아버린 역사적인 공간에서 우리들 현대인이 경험할 수 있는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식이 바탕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지식이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껏 즐겁게 옛 시절을 상상해보시기를! 그 누구도 그 상상이 틀렸다고 나무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전면에 우뚝 솟아 있는 람세스 3세 장례신전의 탑문입니다. 이 탑문 (Pylon)이라 불리는 구조물은 앞으로도 이집트 신전을 방문하실 때마다 계속해서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탑문은 ‘신전의 대문으로 기능하는 높은 벽형태의 구조물’ 정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신전의 탑문에는 대체로 음각 혹은 양각으로 부조가 새겨져있는데 이곳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이곳에는 진부할 정도로 자주 반복되는 모티브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파라오가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한데 묶어서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탑문의 규모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넓은 공간, 그리고 훌륭한 보존 상태 등이 어우러져서 이 부조는 매우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거기에 부조가 갖고 있는 대칭성은 이 부조를 한층 더 멋스럽게 보이게 만듭니다. 이곳에는 두 명의 신이 등장하는데, 북쪽, 그러니까 탑문을 바라보았을 때에 오른쪽 편에는 라-호라크티(Ra-Horakhty), 그리고 남쪽은 아멘-라(Amen-Ra)가 서 있습니다. 이민족 포로를 사로잡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전쟁과 원정사업이 거의 없었던 시대의 파라오들도 꾸준히 사용하던 모티브입니다. 파라오의 신성한 왕권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던 일종의 문법 같은 예술 형식이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람세스 3세의 시대는 실제로 많은 전쟁이 치러졌던 시대입니다. 끊임없는 남쪽으로 누비아 원정과 북동쪽으로의 시리아 원정, 그리고 서쪽에서 이집트로 침략해오는 리비아인들과의 전쟁, 마지막으로 지중해에서부터 이집트로 침략해온 해양민족과의 해전. 이곳에서 만큼은 이 진부한 모티브가 - 물론 무척이나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 역사적인 기록이었습니다. 신전 전체가 람세스 3세 시대에 겪었던 전쟁과 전투에 대한 묘사로 뒤덮여져 있는데 람세스 3세는 이 신전을 그가 치른 전쟁을 기록하기 위한 기념물로 여기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앞마당 전면에 서 서있는 높이가 거의 3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문을 지나게 되면 이번에는 첫 번째 마당(First Court)이라고 불리는 공간에 서 있게 됩니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신전의 마당이지만 적어도 이 한가지는 특별합니다. 그것은 이곳이 신전의 마당인 동시에 왕궁의 마당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신전과 왕궁이 마당을 공유한고 있다는 사실은 메디넷 하부가 하나의 자그마한 도시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이 마당 한 가운데에서 앞으로 쭉 직진을 하면 신전이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왼쪽으로 돌면 궁전의 입구가 있습니다. 하부 구조만 겨우 남아 있기 때문에 이곳이 정말 파라오의 궁전이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곳은 람세스 3세가 실제로 사용하기도 했던 왕궁이었습니다.이곳에서 보시는 것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궁전조차도 신전에 비교하면 엉성하게 지어졌습니다. 그것은 현생에서의 삶은 무척이나 짧고 의미가 깊지 않다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것이 당대에는 분명한 상식이었습니다.
이곳 첫 번째 마당은 궁전의 위치로 인해서 비대칭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왼편에는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지만 그 반대편에는 일곱 개의 오시리스 석상이 서 있습니다. 오시리스는 사후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었는데 파라오들은 사후의 세계에서 이 오시리스와 일체화된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라오의 장례와 관련이 있는 곳에서는, 예컨대 무덤 속이라던가 장례신전에서는 파라오들은 종종 오시리스의 모습을 하고 등장합니다.
앞에서 전면을 살펴보았던 제1탑문의 후면과 이 곳 첫 번째 마당 곳곳에는 람세스 3세의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지중해 방면에서부터 이집트로 쳐들어온 해양민족을 물리는 장면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적들의 잘린 손목을 합산하며 시체수를 헤아리는 음산한 묘사가 눈길을 끕니다.
첫 번째 마당에서 마주할 수 있는 두 번째 탑문에도 역시 파라오가 전쟁에서 세운 공적들을 묘사한 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새겨져 있는 똑같은 내용의 부조들이 이쯤 되면 서서히 지겨워집니다. 누군가가 근사한 무용담을 들려주면 처음에는 그 긴박한 넘치는 이야기에 관심이 가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점차 흥미가 뚝 끊어지고 지겨워지는, 딱 그런 기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이런 기분을 람세스 3세 같은 의지와 열정이 넘치는 저돌적인 인물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마당의 진부함에서 재빨리 탈출하고자 발걸음을 옮겨 두 번째 마당으로 접어들면, 처참한 장면에 조금은 놀라게 됩니다. 이곳에서 우리가 앞서서 제 1 마당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오시리스의 모습으로 분한 파라오의 석상을 또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 같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습니다. 메디넷 하부는 한 때 기독교인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은 물론 고대문명을 ‘이교도 문명’이라고 배척하며 끔찍이도 부끄러워했던 이집트 기독교인들이 이런 파괴를 자행한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고대 유적지를 적극적으로 파괴한 경우는 사실 이집트 곳곳에서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특정 종교에 관한 논평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것이기는하지만 이집트학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파괴는 상당히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의 파괴행위 역시도 ‘기독교 문명’의 일환으로 진지하게 존중되어야 합니다. 수백 년 혹은 수천년 후의 고고학자들은 서슴지 않고 옛 흔적들을 시멘트와 콘트리트로 뒤덮어 버리는 오늘날의 ‘개발사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을까요? 존중하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그런 감정말입니다.
이 파괴의 장 뒤로 이어지는 공간은 기둥의 밑동만 겨우 남아 있는 열주실과 다양한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 그리고 실제로 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던 지성소 같은 곳들입니다. 하지만 신전의 전면부와 비교하면 규모도 작아질뿐더러 보존 상태도 앞쪽에 비해서는 양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연구자가 아닌 분들께는 조금 시시한 느낌이 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대부분 신전이 활발하게 운영되던 당대에는 신전전면부보다 더 중요한 공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절대로 공개되지 않던 공간입니다. 분명 최고위층의 신관들이나 파라오만이 이 신전 깊숙한 곳에 다다를 자격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 시절의 건축가들은 어찌된 이유에선지 이렇게나 중요하고도 신성한 공간을 신전 전면부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신전의 전면부가 거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오늘날에도 여전히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대 반해서 신전의 핵심부가 이렇게 남겨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들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아마도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봅니다.
그들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여지지 않는 부분에 투입되는 노력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보이는 부분을 최상의 형태로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오늘날에도 그러하고, 또 가까운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한 집단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과를 실제보다 더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많은 이들에게 드러내고, 또 그걸 바탕으로 자신들이 반드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해야함을 역설합니다. 사실 그런 욕망은 통치자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PR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불리는 과장된 자기 포장이 굳이 비난 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 것이 인간사라는 사실에 조금은 씁쓸해집니다. 옛 시절의 이집트인들 그리고 반신반인의 존재였던 파라오들도 분명 오늘날의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사진:곽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