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선생님은 열등생
울 선생님은 열등생
2016.08.05 13:23 by 시골교사

“아놔, 수업시간에 이미 다 설명했던 것을…”

자존심에 커다란 금이 갔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조교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나와 독일 학생들을 철저히 차별했다. 독일 학생의 질문 앞에선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조곤조곤 여유 있게 대답해주더니, 내가 던진 질문엔 아주 귀찮다는 듯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어떤 질문엔 면박을, 어떤 내용에는 긴 한숨을. 심지어 너무 빠르게 설명하는 통에 그 꾸중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이중적이고 거만한 태도 앞에 그녀를 찾은 본래의 목적은 이루지도 못하고 기분만 상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찾은, 아니 찾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말 못하고 공부 못하는 내 탓인걸!

그래. 누굴 탓하랴…(사진:Mindmo/shutterstock.com)

 

| 자존심, 철저히 구겨지다

독일 대학의 시험문제는 대부분 ‘위붕’(연습시간)을 맡은 박사과정의 조교들이 주로 내고, 그들이 채점한다.(물론 교수가 직접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말은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 내용만 가지고는 좋은 점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시험기간에 조교 연구실 문턱을 수시로 넘는 이유도 그래서다.

개중 친절한 조교는 답답한 외국인의 언어 실력을 감안하여 천천히 설명 해주지만, 아주 거만한 조교는 사람의 자존심을 구기기도 한다.

그날은 통계분석학 시험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그 시험은 8학점짜리로, 학점이 높은 만큼 부담도 컸다. 시험을 며칠 앞두고 모르는 부분을 잔뜩 짊어지고 담당조교를 찾았다. 이 과목 위붕을 담당한 조교는 중국인이었다. 중국 친구들은 이 조교가 베이징 대학교를 졸업한 수재라며 존경하는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내 눈에도 그녀는 보통이 아니었다. 수업을 영어도 아닌 독일어로 진행하는데, 그녀의 독일어 구사력은 완벽해 보였다. 무엇보다 독일 학생들도 그녀의 수학 실력 앞에 기가 눌릴 정도로 아주 명쾌하게 연습시간을 진행해 나갔다. 그 완벽한 조교에게 나는 완벽하게 무시를 당하고 만 것이다.

뭐라고 혼내는 지, 못 알아듣는 게 더 비참함…(사진:Pranch/shutterstock.com)

 

| 젊었을 때 공부 좀 할걸…

만학의 진통을 느낄 때면, 불현듯 후회가 밀려온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을 할 때까지 5년. 난 정말 베짱이처럼 시간을 보냈다.

내 꿈은 교사였다. 보고 자란 직업이 그것 외에는 별로 없었다. 언니 두 분이 교사이고, 그 언니들을 중심으로 형부, 시댁 식구들도 주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교사의 꿈을 품게 되었고, 사범대학 졸업과 동시에 임용고사에 합격하여 교단에 섰다. 그런 스스로가 기특했고, 꿈꿔왔던 목표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했다.

교사로서 내 첫 발령지는 충남 장항의 한 공업고등학교. 지금은 작은 공업지역으로 변했지만,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제철소를 중심으로 한솔제지, LG금속 등 굵직굵직한 산업시설이 즐비했던 지역이었다. 공고 학생들에게 꿈과 미래를 심어 주기에 제격이었단 얘기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긴 베짱이의 배짱은 독이 됐다.(사진:mArt88/shutterstock.com)

몇 가지 핑계는 있다. 막상 실업계 고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보니, 그곳에서 인문교과는 찬밥이라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전공교과와 취업뿐이었다. 그런 근무여건에서 긴장하며 수업을 준비할 동기도, 부담도 없었다. 인문교과 선생님들 중 젊은 분들은 여유 있는 시간을 이용해 대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승진하는데 일찍 눈을 뜬 교사들은 연구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 공부와 승진은 다른 나라 얘기였다.

시선은 오히려 밖으로 향했다. 장항에서 배로 10분이면 군산에 닿을 수 있어 시골의 적막함과 답답함을 풀 수도 있었고, 인근에 무창포, 춘장대, 동백정과 같은 해수욕장과 볼거리가 있어 주말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도 있었다.

먼 타지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며 '젊었을 때 공부 좀 할걸!', ‘대학원을 나왔으면 삼십 넘은 나이에 이렇게 고생하지 않을텐데’라고 후회하는 건 다 그때의 내가 만든 결과겠지.

 

| 뇌야, 뇌야. 조금만 더 버텨줘!

내 전공은 일반사회교육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사회선생님을 짝사랑했던 경험 때문(혹은 덕분)이다. 하지만 딱히 전공이라고 내세우긴 부끄럽다. 과목 별로 4년에 걸쳐 배워도 시원찮을 법, 정치, 경제, 사회학 과목들을 일반사회라는 이름으로 묶어 4년, 것도 교양과 교직과목 배우던 학기를 제하면 배운 기간이 3년이 나 채 될까? 그러다보니 지식의 깊이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독일에 와선 경제학을 선택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일 대학 강의실 앞 로비(사진:시골교사)

원래 나는 독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직업병처럼 독일의 교육철학, 교육방법이 궁금했다. 하지만 일의 진행이 내 맘 같지 않았다. 교육청에서는 전공과목의 연장선이 아니면 유학 휴직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게 경제학이다. ‘경제학은 다른 과목(법학, 사회학, 정치학)에 비해 수학 계산이 많으니 훨씬 명확하고 수월할 거야’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경제학을 선택했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대수학과 통계학 등의 과목은 숫자계산이라 그나마 괜찮았지만, 부기 과목은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어려웠고, 경영학 개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한 학기 들었던 경영학을, 십 여 년이 지나서, 것도 독일어로 이해하며 외워야 한다니…

게다가 수업량은 숨이 막힐 정도로 많았다. 매 과목마다 600페이지가 넘는 개론서의 진도를 마지막 한 장까지 배운다. 듬성듬성, 대충대충 넘어가는 부분이 있어줘야 숨을 좀 쉬는데 정말 에누리가 없다. 더 갑갑한 건 그렇게 나간 진도만큼이 오롯이 시험범위라는 점이다. 문제를 가르쳐 주거나 시험범위를 줄여주는 법도 없다.

그냥 600 페이지짜리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란 얘기다. 우리처럼 ‘족보’ 같은 것도 없다. 학과 홈페이지에 보통 5회 정도의 기출문제가 올라오는데, 기출문제를 모두 풀어도 문제는 해마다 어찌 그리 다양한지!

특히 경영학 개론 내용에는 계산 외에도 개념, 정의, 특징, 장・단점 등이 많다. 그 많은 내용들을 내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 해석하여, 이해되는 부분은 이해 되는대로, 안 되는 부분은 문자 그대로 통째로 외워 나갔다. 하지만 나이 탓인지 나의 기억력은 용량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씹어 먹고 싶다. 경제학 너!(사진:Tashatuvango/shutterstock.com)

원래 나는 암기를 잘 하는 편이었다. 대학 때는 교수님의 강의내용을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고 받아 적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앉아 그 내용을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워 시험장에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웬걸! 빡빡하게 정리된 A4용지 다섯 장 정도를 외우고 여섯 장 째 접어들면, 첫 장의 내용이 슥슥 지워지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은 뭐지?, 나의 뇌 용량이 언제부터 다섯 장짜리로 전락했단 말인가?

 

germany

유학생은 자격증 없는 미용사

 

독일에 올 때 가져오고 싶었던 물건 중 하나가 바로 ‘바리캉’입니다. 인건비가 비싸, 머리를 깎는 데만 최소 2~3만원이 든다는 정보 때문이죠. 형편이 안 좋다고 온 가족이 장발족이 될 순 없으니까요. 일단 기계라도 사서 들고 갈 생각으로, 다니던 미용실 주인에게 물어보니 쓸 만한 것이 10만원이 넘는다고….

 고민만 하다 사오진 못하고 한동안은 아쉬운 대로 가위만으로 남편 머리를 깎아 줬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대형마트 ‘3유로(Euro)’ 코너에서 5000원 정도에 바리캉을 득템했죠. 싸구려지만, 그런대로 유학기간 내내 요긴하게 쓸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사용법조차 제대로 몰라 깎아 놓으면 영 어색하기만 했어요. 그러다 유학생 중에 손재주 좋은 분을 통해 바리캉 사용법을 배운 뒤로는 제법 깎는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죠. 

하지만 남편 생각은 달랐나봅니다. 머리를 깎일 때마다 소요되는 긴 시간으로 지루해 했고, 언제 뜯길 줄 모르는 긴장감으로 깎이는 내내 불안해 하기도 했죠. 굳이 변명을 하자면 두 달에 한번 꼴로 머리를 깎는 나로선 실력이 늘 새도, 숙련도가 쌓일 여유도 없어 시간은 늘 오래 걸렸고, 기술 또한 별반 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고 했던가요? 하지만 전 이곳에서 내 머리를 혼자 깎기 시작했어요. 사실 내 머리는 가위가 깔짝깔짝 몇 번만 가면 그만이었죠. 워낙 숱이 없기 때문에 양쪽 옆머리와 뒷머리에 가위를 서너 번씩만 대도 유학생에게 만족할만한 헤어스타일이 나옵니다. 

유학생에게 폼과 맵시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모든 건 생존의 문제 뒤편인 것을!

(사진:Africa Studio/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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