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국인 관광객들 참 많아.”
명동 중심부, 지인A가 한 무리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목이 약간 늘어난 새빨간 티셔츠,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에 동색의 반바지
펑퍼짐한 몸과 날선 스포츠머리의 부조화
존재감을 뽐내는 금빛 액세서리에
주렁주렁 매단 쇼핑백까지…
이들은 과연, 중국인 관광객들일까요?
그들의 시선
“언니, 요즘 동대문에서 일하기 힘들어 죽겠어요. 중국 사람들은 도대체 보는 눈이 있기나 한 걸까요?”
이번 호는 한국에서 패션 의류 업계에 종사하는 지인 J의 하소연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푸념은 한국으로 쇼핑 관광을 온 중국인들의 독특한 취향 탓인데요, 그들이 선호하는 옷과 구두, 가방은 우리 눈에는 오히려 촌스러운 것들이 상당하답니다. 하지만 취향에 대해 단호한 그들을 위해 중국인 입맛에 맞는 원색적이면서도 조악한 디자인의 옷을 따로 제작한다는 것이죠.
“업체들 입장에선 한국 소비자용 제품과 중국인 관광객용 제품 두 가지를 따로 제작하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에요. 왜 한국까지 와서 촌스런 제품만 싹 쓸어 가는 걸까요?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돈 많은 거랑 ‘촌티’를 벗어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인가 봐요.”
올해로 6년 째 동대문 상가에서 옷을 제작‧판매해오고 있는 J는 중국인 관광객 취향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그들만의 패션 취향 때문이겠죠.
그녀의 시선
중국의 여배우 판삥삥(范冰冰‧35)을 아시나요? 국내에선 지난 2014년 개봉한 히트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로 많이 알려졌지만, 중국에선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구가하는 연예인입니다. 그녀가 한 해 벌어들이는 영화, 드라마, 광고 수입만 1억 2000만 위안(약 200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당대 중국 최고의 여배우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죠.
이 아리따운 여배우가, 이해하기 어려운 중국인들의 패션 취향을 가장 대표적으로 대변해주는 인물이라면 믿어지십니까?
판삥삥의 패션 센스는 서방 언론에서 한마디로 ‘볼품없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전 세계 유명 패션 업계 종사자들이 모두 손사래를 칠 정도죠.
하얀 피부와 큰 눈을 트레이드마크로 가진 그녀의 훌륭한 외모와 비교해, 그녀가 입고 신고 메고 다니는 차림새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오히려 조악한 그녀 패션 센스 탓에 그녀가 방문한 서방 각국에서는 그녀가 찍힌 사진을 두고 올해 ‘최악의 패션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씌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외 언론을 통해 매년 최악의 패션 스타일로 꼽히는 그녀는 중국에서 나고 자란 토종 중국인으로, 중국인의 대표 취향이 바로 그녀의 취향인 것이죠.
이는 지금껏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진 ‘공리(巩俐)’, ‘장바이즈(张柏芝)’, ‘안젤라베이비(杨颖)’ 등 유명 여배우들이 타이완, 홍콩 등 일부 서방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성장한 뒤 중국 대륙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는 점과 명백히 대비됩니다. 토종 중국 대륙인인 판삥삥은 기존의 유명 여배우들이 선호하는 옷차림새와는 한 눈에 봐도 다를 만큼, ‘중국색(中國色)’이 완연한 것이죠.
우리가 주목할 점은 ‘판삥삥’ 그녀의 패션 센스와 취향이 곧 14억 중국인들의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입니다. 중국 현지에서는 그녀가 입고, 메고, 신고 나오는 모든 것들이 큰 화제를 몰고 다닙니다. 다른 어떤 여배우들보다, 판삥삥의 패션에 더 큰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죠.
그 인기의 정도는 중국색을 그대로 담아낸 그녀의 차림새뿐만 아니라, 짙은 눈썹과 빨갛고 진하게 바르는 립스틱 취향에 까지 이릅니다. 중국은 온통 그녀의 스타일이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우리에겐 다소 짙고, 지나친 듯 보이는 색조화장도 이곳에서는 오히려 남달리 뛰어난 패션센스로 비춰지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중국인들의 옷차림새와 관련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필자가 한 때 한국어 강의 봉사 활동을 했던 베이징의 한 대학 캠퍼스의 첫 인상인데, 녹슨 자전거에 몸을 싣고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페달을 밟는 학생과 그들의 입고 있는 지나치게 원색적이거나, 낡은 옷차림새가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죠.
당시 함께 있던 지인에게 필자는 “여기 우리 엄마 아빠가 공부했던 과거의 캠퍼스 같다”며 탄성을 자아냈던 기억이 납니다.
수년이 흐른 지금이야 말끔한 캐주얼 차림의 학생들이 삐걱대는 자전거 대신 전동자전거(한국의 오토바이와 유사함)에 몸을 싣고 세련된 동작으로 캠퍼스를 누비지만, 지금도 여전히 도시에서 1시간 정도만 외곽으로 벗어나거나 지방의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을 방문할 경우 수 년 전 ‘베이징런(北京人)’보다 더 조악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때마다 마치 과거로 회귀하는 버스를 타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에 잠시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필자의 인식이 비단 필자만의 것은 아닌가 봅니다. 중국 현지인들조차 도시와 시골 마을의 옷차림새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죠.
지난 춘절 기간에 중국 최대 SNS 웨이보에서 최고의 클릭 수를 기록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춘절 기간 시골 고향을 방문한 네티즌들이 고향 방문 전 후 입고 있는 옷차림새를 사진에 담에 자신들의 온라인 sns에 게재한 것이죠.
몸빼바지 차임의 헐렁한 시골 아낙 같은 분위기의 여성과, 도시에서의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몸에 착 달라붙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 사진 속에 대비되듯 담겨 있습니다. 사진 속 그녀들은 서로 다른 옷차림새뿐만 아니라 그들의 표정까지 마치 다른 사람인 듯 느껴질 정도로 도드라지게 달라 보이죠. 중국에서는 이 같은 ‘역변의 사진’을 온라인에 게재하는 것이 최근 새롭게 등장한 유행 중 하나입니다.
어찌됐든 최근엔 중국 내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조악한 패션 솜씨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각 분야에서 눈에 띄는 현상을 만들고 있죠.
지난 몇 년 사이 중국에서 잘 팔려나가는 서적 가운데 하나는 ‘의상 코디 및 메이크업 강의’를 내용으로 담은 책이 꼽힙니다.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베스트셀러 코너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서적은 늘 여성들의 의상 차림새를 지도해주는 ‘코디네이터 북’인데, 내용은 옷을 구매할 때 잘 어울리는 색상 조합과 온라인 상점을 소개하는 단순한 내용에 불과하지만, 수년째 수백만 권이 팔려나가는 기염을 토하고 있죠.
마치 과거 한국의 여성들이 유명 패션 잡지를 구독하며 의상과 패션에 큰 관심을 보였던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또한 패션에 대한 그들의 깊은 관심은 뉴욕, 파리 패션위크 기간 동안 럭셔리 단체 관광 상품을 등장시키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중국의 럭셔리 관광 업체 ‘하이라이프 아시아(high life asia)’는 약 5만 달러에 달하는 고급 여행 패키기 상품으로 뉴욕에서 7일간의 패션 투어 상품을 판매한 바 있습니다. 해당 상품에는 뉴욕 패션위크 패션쇼에 참가하고, 고급 백화점을 순회하는 것이 관광 일정에 포함돼 있는데, 해당 상품은 조기에 판매가 마갈될 정도로 현지에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죠. 여행을 떠난 이들은 고급 백화점에 들러, 관광기간 동안에만 약 500만 달러 이상 쇼핑을 하며 패션에 대한 관심을 입증하기도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이 같은 변화의 대표적인 이유에 대해, 그들의 수입이 고공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월수입이 5000위안(약 100만원) 초과 여부에 따라 중국인들이 패션에 대한 관심을 현실에서 실천하기도, 또는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최근 중국 국정연구소(國政硏究所)는 중국인들의 패션 지수에 대해 자체적인 평가 기준으로 83점으로 결론짓고, 이는 10년전 보다 약 20점 상승한 수치이며 중국인들의 패션에 대한 기대감 역시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분석했습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월평균 소득이 5000위안을 넘어서는 대도시를 기준으로, 패션에 대한 염원이 현실화 된 것”이며 “월수입이 높은 대도시 거주민 일수록 유행에 더욱 민감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더욱이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 일부 1선 대도시의 근로자 평균 임금 수준은 이미 1만 위안 이상을 넘어선 지역도 상당하다는 점에서, ‘촌스러움’의 대명사가 되어야 했던 중국인들이 그들만의 ‘중국색(中國色)’을 벗어낼 시기가 머지않아 보입니다. 그땐, 동대문으로 쇼핑 관광을 온 수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촌스런’ 버전의 별도 제작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죠.
/사진: 제인 린(Jane lin)
중국에 대한 101가지 오해 언론에 의해 비춰지는 중국은 여전히 낡고, 누추하며, 일면 더럽다. 하지만 낡고 더러운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중국은 그 역사만큼 깊고, 땅 덩어리만큼 넓으며, 사람 수 만큼 다양하다. 꿈을 찾아 베이징의 정착한 전직 기자가 전하는 3년여의 기록을 통해, 진짜 중국을 조명해본다.
여의도에서의 정치부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무작정 중국행. 새삶을 시작한지 무려 5년 째다. 지금은 중국의 모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