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웅장함을 기억하는 거리, ‘비아 쥴리아(Via Giulia)
르네상스의 웅장함을 기억하는 거리, ‘비아 쥴리아(Via Giulia)
르네상스의 웅장함을 기억하는 거리, ‘비아 쥴리아(Via Giulia)
2016.09.12 18:17 by 김보연

“내가 사는 곳이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 중 하나입니다.”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함께하는 로컬가이드 중 한 명이 자신 있게 꺼낸 얘기. “르네상스 때 만들어진 길”이라는 설명을 시작으로 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미천한 이탈리아어 탓에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길 이름은 정확히 기억난다. 오늘 소개할 ‘비아 쥴리아(Via Giulia)’가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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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쥴리아 전경.

언제 나눈 지 기억도 못할 이야기 속 길 이름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이 길 위에 로마에서 유명한 베트남 음식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쌀국수가 무지 먹고 싶었던 날, 점심 때 집을 나서 그 음식점으로 향했다. 지도 어플리케이션 안내에 따라 어렵사리 식당에 당도했건만, 웬걸 식당은 저녁에만 오픈한단다. 공쳤다고 생각하고 스마트폰 지도에 북마크를 해놓다가 무심코 길 이름을 읽어보니 비아 쥴리아, 그때 그 비아 쥴리아였던 거다.

이탈리아 어느 곳이던 항상 자리 잡은 Bar. 짧은 에스프레소의 시간
잘 꾸며놓은 미용실 앞의 나이 든 책들
어느 궁전의, 지금은 누가 사는 아파트의 장식들. 디테일에서 로마를 느낀다.
비아 쥴리아의 자부심이 느껴지던 깃발. 식당, 가게, 호텔 할 것 없이 걸려있다.

그날 그 길의 기억은 그게 끝이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일상과 사람들의 스트레스에 찌들대로 찌를 무렵, 문득 ‘로마의 멋을 듬뿍 느낄 공간’이 필요했다.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이라던 그곳을 다시 찾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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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쥴리아는 테베레 강변에 있는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 근처에서 시작한다. 테베레 강변의 굽이치는 노선을 따라 한 골목 들어가서 길게 쭉 뻗었다. 끝나는 부분은 캄포데피오리(Campo de Fiori), 나보나광장(Piazza Navona) 근처와 가깝다. 강을 건너면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지역으로 갈 수도 있다.

이 길은 이름(VIA JULIA)에서 느껴지듯 율리우스(Julio)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16세기 초반 교황님이다.

1503년에 즉위한 이 교황님은 우리가 기억하는 바티칸 박물관의 모습을 거의 만들어낸 분이다. 라파엘로를 불러 아테네학당을, 미켈란젤로를 불러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를, 브라만테를 불러 베드로 성당을 짓게 했다. 교황청과 더불어 인근 지역도 개발해나가기 시작했는데, 비아 쥴리아는 거기에 속한 길이다. 길을 걷다보니 지난 2008년, 길이 만들어진 지 500년을 기념해 만든 깃발들이 자주 보였다.

워낙 유서 깊은 길이다 보니, 쭈루룩 서 있는 웅장한 건물들은 대부분 Palazzo, 즉 궁전이다. 길도 널찍하니 여유롭다. 유력 가문들의 궁들이 서고,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했으리라. 그런 길에 오히려 요즘은 차가 별로 없으니, 뭔가 헛헛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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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마차가 차지했을 것 같은 공간들

르네상스의 분위기 탓인지, 지금도 이 길에는 많은 갤러리들이 있다. 네로의 궁전에서 시작된 ‘그로테스크’ 문양의 작품이 있는 곳도 있었다. 길 중간에서 출판사 하나를 만났는데, 영어, 터키어, 심지어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책도 있었다. 괜스레 한국어 책은 없나 싶어 돌아다니다 사무실 입구에서 접한 대형 스케치. 18세기 비아 쥴리아의 풍경이다. ‘아, 역시 상상 속의 그 모습이로구나 .’

서점 풍경
18세기 비아 줄리아
한 장 얻었다! 지금은 내 책갈피로.

서점에서 만난 할아버지(나에게 옛 비아 쥴리아 엽서를 주신 분)는 나에게 잠깐 동안 상상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는 수백 년 전 르네상스의 기운이 고스란히 남겨진 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컸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책과 문화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이런 멋스러운 출판사를 차리고 열심히 일하셨겠지. 그리고 노년이 되어, 마치 도서관처럼 출판사를 꾸며놓고 자신은 책을 읽거나 스도쿠를 풀다가 웬 동양인 여행객이 들어와 기웃거리면, 손에 옛 스케치가 프린트된 판판한 종이 한 장을 쥐어준다. 그런 여유, 그런 삶이란

이 골목은 그 이름 모를 할어버지의 삶처럼 고상하고 멋스러웠다. 나 같이 기웃거리는 여행객들도 있었지만, 옛 르네상스의 궁전들은 이제 누군가의 집이고 사무실이다.(외부인은 출입하지 못하고, 사진도 찍으면 안 된다는 표시엔 못내 치사하다 느끼기도 했지만.) 실상 이 길은 지어질 때, 거리 쪽으로는 상점들이나 문만 보이게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원이 펼쳐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 안을 기웃거릴 땐 더 많은 상상이 머리를 헤집는다. 정원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곳에 사는 친구를 만들고 싶다면, 너무 궁색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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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중 몇 개는 호텔, 작은 미술관, 외국어 아카데미, 대사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군데군데 군인용 트럭과 무장한 군인들도 눈에 띈다. 이것저것 잡기들을 파는 가게 앞엔 주민들과 가게의 주인이 앉아서 수다를 떤다. 사진 찍히는 소리에 날 쳐다본 파란색 원피스의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Ciao’(이탈리아 인사말)하고 수다로 돌아가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널찍하고 배포 크게 만들어진 이 길에 참 어울린다.

Ci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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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방문하신 수녀님들. 또르르르르 굴러가는 유리구슬처럼.

이런 멋짐을 간직한 로마의 길이라니. 이 골목을 신나게 설명해주던 그 가이드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저녁에 다시 방문해서 쌀국수를 푸짐히 먹고, 배가 꺼질 때까지 천천히 걸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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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전경. 다신 봐도 여유롭고 멋지다.

/사진: 김보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죠'걷고 또 걷는다.' 걸작이라 불리는 도시 ‘로마’를 백 배 만끽하는 비법이다. 한때 전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드나들었던 로마의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 작은 골목길이든, 큰 광장길이든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연이 즐비하다. 로마살이 1년 차 에디터가 전하는 ‘로마의 길’ 이야기를 통해, 콜로세움과 바티칸 너머의 진짜 로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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