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다는 것
늙었다는 것
2016.10.04 18:20 by 오휘명
(일러스트:MaKars/shutterstock.com)

나는 남들보다 이른 아침에, 그러니까 아침과 새벽의 경계 어디쯤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떴다. 오늘도 무사히 눈을 뜬 건가. 그런 것 같았다. 창밖에서는 천사들이 날아다니지 않았고 찬송가 같은 것도 일단은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하룻밤만큼 더 살아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주름의 개수와 이른 기상起床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다. 엉뚱했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새벽의 찬 기운과 아침의 ‘지나치게’ 활발한 분위기들이 일련의 분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들에게는 인간의 몸에 들러붙거나 침투하려는 성질이 있어,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잠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정확하게 연령을 구분 지을 순 없겠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래 보이는-의 이곳저곳 주름이 많이 진 몸에는 그 침투가 잘 이루어져, 유독 일찍 잠에서 깨게끔 하는 것이다. 물론 늙은이들이 잠이 적은 이유를 의학적으로 더욱 잘 설명해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의 괴상한 망상은 그랬다.

젊은이들보다 일찍 눈을 떠, 젊은이들보다 천천히 움직인다.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밥을 먹고 몸을 정돈하고 나면 집 바깥의 세상엔 어느새 분주한 자들이 넘쳐나곤 했다. 목욕을 하고 얼마간 거울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든 대추처럼 쪼그라들고, 심하게 변색된 어떤 과일처럼 바라진 살결이 초라하게만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따뜻한 옷 몇 벌로 빈틈없이 몸을 덮어야만 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것 하나만큼은 수십 년 전과 똑같았다. 젊은 사람들은 남녀가 쌍을 이루어 걷거나, 동무들끼리 무리를 지어 걸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말과 노래를 부르며 끼리끼리 신나게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거리에는 끊임없이 노래가 흘렀다. 여러 점포에서, 음식점과 주점의 실내로부터, 제목을 알 수 없는 유행가들이 들려왔다. 그것들을 들으며 걷다 보면, 언젠가 젊은이들이 걸으면서 불렀던 노래의 가사가 겹쳐 들리기도 했다.

유행하는 여러 사랑 노래들을 듣는 일,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 다른 곳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보는 일은 마치 오래전 지나간 로맨스를 기억하는 것과 닮아있었다. 흐릿했던 사랑의 기억들.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과 여러 여인, 그리고 애정의 장면들이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몇 년 전 나를 떠나간 아내의 기억이 차례로 머리를 스쳤다. 그 기억들은 정말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금의 유행가들과 닮아있어서, 어떤 부분은 ‘그녀는 내게 왜 그랬는지, 그리고 나는 또 그녀에게 왜 그랬을까’처럼 이해할 수 없는 구석도 있었고, 어느 부분(아마도 아내의 기억이겠지)은 너무도 명료하여 따라 부를 수(온전히 기억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양로원 문 여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는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나이에 맞지 않게 고운 얼굴과 아양기가 넘치는 목소리는 나를 정신 못 차리게끔 했다. 남편과는 나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사별을 했다고 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고 떠나간 나의 아내에게도 미안하지만, 노인들의 로맨스(내가 청년일 때엔 ‘로망스’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곤 했었다)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누구 하나 원래부터 홀몸이었던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죄스러운 사랑은 무엇일까요?”

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주저함이 없이 노인들의 사랑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

“알았네, 나도 곧 가지.”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것의 무게는 유독 무거웠고, 나는 그것보다도 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애초에 준비할 수가 있겠냐만,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으로 친구들의 부고訃告를 전해 듣는 일은 매번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오늘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무생동 최 씨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그는 나와는 양로원 내에서도 꽤 각별했던 사이였고, 때로는 좋은 술동무가 되어주기도 했었기에 슬픈 마음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오늘은 다 쪼그라든 몸을 검은색 양복으로 덮어내야만 했었다.

빈소에 도착하니, 벌써 양로원 사람들 몇몇이 와있는 것이 보였다. 다 무생동에 또는 그 주변 동네에 거처가 있는 이들이었다. 나는 예를 갖추고, 그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가 조용히 앉았다. 장내는 어수선하다기보단 왁자지껄하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만큼 시끄러웠다. 친지로 보이는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각각의 기억으로 망자를 기리는 것처럼 보였다. 또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반가워 얼싸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여러 말들이 들려왔다. 마치 뜻을 알 수 없는 유행가처럼.

“솔직히 호상이 맞죠. 아니, 주무시다가 조용히 돌아가신 건데, 이 정도면 박수를 치고 춤을 춰도 할 말이 없다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짓눌린 공기를 뚫고 나의 귀에 박혔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나와 함께 있는 여러 노인에게도 아주 명료히 들렸으리라. 우리는 말이 없었다. 조용히 죽는 것이 축하받을 일이 되어버린 사람들. 우리는 그런 알 수 없는 축복을 두려워하다가도, 아, 그런가보다. 저 친구는 어쨌든 축하받을만한 일을 겪은 거구나. 싶은 마음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소주를 몇 병쯤 비웠을 때, 문 여사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몇 분을 서럽게 통곡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둘만의 추억이 또 있었으리라. 눈물을 그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문 여사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이상하게도 여느 때 같은 설렘은 두드러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보다는 죄스러운 마음, 어찌 됐건 조만간 누구 한쪽은 죽으니, 시작도 하기 싫은 마음만이 남아있었다. 문 여사와 나를 비롯한 양로원 식구들은 소주 몇 병쯤을 더 들이키다가, 푹 고꾸라진 김 영감을 함께 부축해 빈소를 나섰다.

*

몇십 억 년이 지나도 지구라는 존재의 연령은 한창인지,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몽롱한 중에서 침대에 눕는 것이 꺼려졌다. 오늘은 자는 것이 유독 두려운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그 뒤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그러면 나도 젊은이들의 이상한 축하를 받는 걸까?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일이면 양로원으로 동료 몇몇이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떠난 자들의 물건을 함께 정리를 할 것이다. 그것만이 남은 자들이 떠난 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최 씨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겠지만, 어쩐지 나의 유품을 정리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무섭다. 내일 아침만큼은 ‘아침의 입자들’이 내게 잘 스며들어, 내가 무사히 눈을 뜨길 바랄 뿐이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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