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시체스(Sitges) 유랑기
비 오는 날의 시체스(Sitges) 유랑기
2016.11.01 03:43 by 이한나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 그보다 더 강렬한 지중해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 발길이 움직인 곳은, 무려 17개의 해변을 자랑하는 바르셀로나 인근의 작은 도시 ‘시체스(Sitge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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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스 역시 스페인 바르셀로나 주에 속해 있는 자치시로서, 지중해 휴양도시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 여행자들은 몬세라트와 함께 한 번쯤은 들르게 되는 근교 도시인데, 17개의 해변 중 동성애자들을 위한 해변과 누드 비치가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종종 한국 영화가 초청되곤 하는 ‘시체스 판타스틱 영화제’로 더 익숙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49회를 맞은 시체스 영화제.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때 영화제가 한창이었다. 한국 영화도 4편 초청되었고, 그 중 <부산행>과 <곡성>, <아가씨>가 수상의 쾌거를 맛보았다. 필자는 <타워(Tower)>라는 미국 영화를 관람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체스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지하철역에서 렌페(고속열차)를 타는 방법과 ‘몬버스’라는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인데, 필자는 몬버스를 이용해 시체스로 갔다. 분위기나 경관은 렌페가 좀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버스를 타면 환승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가격도 더 저렴하다(바르셀로나 교통 중심지인 카탈루냐 광장 기준). 홈페이지(http://www.monbus.cat/)에서 정류소와 시간을 자세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체스로 가는 버스는 e16번이다.

 

그런데! 시체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그 광경을 보는 필자의 마음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창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지중해를 만나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설상가상으로 우산도 챙겨 오지 않았다. 꼼짝 없이 우산을 사야 하나 싶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필자와는 너무 다른 그들의 행동이 처음에는 당황스럽다가, 이내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비 좀 오고, 바람 좀 불수도 있지 않은가. 이 악천후 또한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렇게 배우게 될 줄이야.

시체스의 백미인 해안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버스가 이동한 방향대로 걸어야 한다. 신기하게도 앞선 득도(?) 이후 다시 바라본 시체스는,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골목골목 스민 정겨움과 한산함도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또한 여기저기 세워져 있는 시체스 영화제 관련 설치물들이 축제 분위기를 한껏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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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여 분을 걷자, 마침내 골목의 끝에서 해안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중 필자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바다의 푸르름이 아닌 길게 늘어서 있는 천막들. 알고 보니 그 천막들의 정체는 영화제 기념품, 영화 마니아들의 소장품 등을 판매하는 부스였다. DVD, 티셔츠, 뱃지… 그 품목도 다양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필자 포함) 절대 그냥은 지나치지 못할 곳이었다. 게다가 천막 사이사이 드러나는 바다와, 좋지 않은 날씨로 인해 거칠어진 파도의 소리가 어우러져 정말 ‘이상한 영화의 바다’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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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발걸음을 왼편으로 옮겼다. 비는 처음보다 좀 더 거세어졌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처음이 싫지, 이미 젖어버린 상태에서 조금 더 젖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bar)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래 가기로 마음먹었던, 침대 테라스로 유명한 바 ‘El Vivero’에서는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바로 옆에 붙어 있던 곳에서 주문을 받아 주었다. 손님은 당연하게도 필자밖에 없었다. 하긴 이 날씨를 뚫고 기어이 야외에서 음료를 마실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유별나다 싶어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오른쪽에 보이는 El Vivero는 누워서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바로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다. 필자는 왼쪽에 있는 작은 바를 이용했다. 다행히 이곳 역시 친절하고, 맛있고, 경관이 좋았다.

우여곡절 끝에 음료를 마시며 비로소 주변을 바라보았다. 비록 꿈꿔왔던 경치는 아니었지만, 바다는 바다였다. 유럽 특유의 예쁜 건물들과 어우러진 발민스 해변의 모습은 날씨와 상관없이 무척 아름다웠다. 아니, 오히려 차분히 지금까지의 여행을 돌아보고,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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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반대편으로는 가보지 못했지만, 예매해 둔 영화 상영시간인 오후 2시 반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쉽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 날씨가 좋아질 것이라 기대하며 일단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은 처음에 버스를 타고 내린 곳과 더 가까워 다시 10여 분을 걸었다. 그 사이에도 날씨는 좋아지는 듯 했다가 다시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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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좋았고, 날씨도 오전보다 나아져 있었다. 다시 걷기 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큰 길에 있는 ‘Triana’라는 식당에 들어가 타파스를 두 개 주문했다. 타파스와 함께 먹을 빵 몇 조각이 무료로 함께 나왔다. 가격은 총 8유로 정도로 비싼 편이었지만 맛은 훌륭했다. 게다가 유럽의 식당으로서는 드물게 Wi-Fi도 제공한다는 어마무시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혼자 먹는 맛있는 한 끼, 의외로 가장 생생히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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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비는 그쳐 있었고, 다시 한 번 의기양양하게 바다 걷기에 도전했다. 아까 그 바에 다시 가니 어느새 문을 닫고 철수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이 꿈같았다. 비 때문에 찍지 못했던 셀카도 찍고, 자세히 보지 못했던 바 근처 산 세바스티안 예배당 주변도 살폈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산 세바스티안 예배당의 모습.

방향을 바꿔, 서서히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길이 잘 닦여 있어 어렵지 않게 해안의 모습을 눈으로 놓치지 않으면서 산책할 수 있었다. 벤치가 많아 쉼이 용이했고, 군데군데 인상적인 조각들이 많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이 낯선 풍경들 속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흐린 날씨 속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었다. 해맑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엄마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 해변이 끝나는 곳에, 시체스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이 있었다. 17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은 시체스를 대표하는 건물인 만큼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결혼식도 자주 열린다는데, 이런 장소에서 결혼한다면 어떤 기분일지 도무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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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입구는 계단을 통해 바다와 곧장 연결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조용히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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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파도는 거셌다. 산책을 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기대했던 예쁜 지중해는 아니었지만 멋있었다. 지중해의 파도와 가만히 독대했던 몇 분의 시간, 난생 처음으로 궂은 날씨가 고마웠다. 물론 맑았다면 더 멀리까지 걸어볼 수 있었을 것이고, 사진도 더 잘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 나름의 멋과 감흥이 있었다. 이 날, 지중해의 바다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멋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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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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