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푸른 수염
2016.11.08 14:07 by 오휘명
(사진: Tithi Luadthong/shutter.com)

선생님,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신체 건강한 보통의 여자이고, 아,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게 됐으니 이제 완벽히 건강한 건 아니게 된 걸까요. 어찌 됐건, 이건 나라는 사람의 사소한 연애담임을 알려드립니다. 다만 나는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짐 혹은 혹을 얻게 된 사람이고, 환자(고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니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전부는, ‘나는 정말 나의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그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다른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나를 ‘사랑하는 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아시나요? 그 사람은 그 모든 게 들통이 난 후에도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짜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한때 그의 턱이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짧게 면도를 해서 푸른 기가 도는 그 턱.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그 파란 수염, 길가의 파란 표지판, 파란 지붕, 모든 것이 진절머리가 날 정도입니다.

일단은 저를 사랑하는 척을 하도록, 연극을 짠 그 사람을 저의 ‘제2의 연인’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의 정체가 들통이 난 날로부터 약 2주가 흘렀습니다. 제가 사랑했던 그 남자는 내게 두 번 정도 용서를 구하는 전화를 걸었지만, 글쎄요, 나는 ‘이 전화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짜인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글쎄요, 내가 그것에 대해 조금 더 강경하게 반응하지 못한 이유는, 일말의 미련이 있었다거나, 10%도 남지 않은 최소한의 마음이 그를 용서하라고 발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선생님, 저는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으로 누구를 믿을 수 있겠으며,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금 시작할 수 있을까요.

*

그렇지만 내 탓이었을 수도 있어요. 멍청했던 탓,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를 사랑한 탓. 이제야 풀리지 않았던 퍼즐이 맞춰지듯, 그와의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던 사랑의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

함께 시장 데이트를 했던 어떤 날을 기억합니다. 왜 있잖아요, 선생님, 멋진 곳에 가서 근사한 음식 같은 것들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소소하고 수수한 것들을 함께하고 싶은 기분, 아시죠? 그날의 내 기분이 그랬어요. 나는 원래 그런 것들이 익숙한 사람이었고, 내가 사랑했던 그에게도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 남자는 참 귀하게 자라온 것 같았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고고한 집안에서 자라온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들었거든요. 시장 거리 역시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시장을 거닐며 여러 음식을 먹었죠, 빈대떡과 김밥 같은 것들이요. 그렇지만 그는 그날따라 입이 짧았어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인 건 알겠지만 오늘은 속이 안 좋다며. 나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습니다.

또 다른 하루를 기억해봅니다. 내 다리가 부러진 날이었습니다.

홀로 여행을 떠났던 날이었고, 내가 외진 언덕 위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무 들뜬 탓이었을까요, 나는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졌고(울타리 정도는 있어도 될 만큼 위험한 길이었는데 말이에요), 나는 불안정한 자세로 착지했습니다. 그날로 나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추락하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정말이지, 울창한 숲의 아래는 시꺼멓고도 깊어, 심해로 ‘가라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 남자는 매일같이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말입니다. 부러진 다리는 괴사해 파랗게 변해가고, 나는 넓은 곳으로 기어나간 후에야 가까스로 타인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쯤이었나요, 그때가 돼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며 병실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서러운 마음에,

“왜 연락이 안 됐어요, 내 다리가 이렇게 될 동안. 뭐 하고 있었어요?”

라고 물었지만, 그는 끝끝내 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나는 모든 일을 섣불리 추측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모든 게 다 틀어진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을 미심쩍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이상해진 걸까요. 저를 사랑했다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그 남자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됐습니다. 제가 이상해진 걸까요.

*

정말이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시골 어딘가의 촌스러운 꼬마아이처럼, 그리고 그 아이가 도시의 도련님을 사랑하듯 그만을 바라봤습니다. 그의 말이 곧 진리라고 생각했으며, 그 역시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도시는 내 생각 이상으로 넓었고, 나는 그와 다른 누군가의 놀음에 놀아난 것입니다. ‘제2의 연인’은 과연 남자였을까요, 여자였을까요. 만일 여자였다면, 그가 정말로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그 여자였을까요? 그가 내게 줬던 모든 선물들을 보여드릴까요? 자요. 이게 그가 내게 준 선물들의 전부에요. 모두 다 요긴하게 쓸 만한 물건들은 아니지만, 그는 이것들을 다 나름의 쓸모가 있는 것들이라며 내게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쓸 곳이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정말로 좋은 것들, 정말로 가치 있는 물건들을 모두 그 ‘제2의 연인’에게 줘버린 건 아닐까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그래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 수가 없게 돼버린 겁니다.

선생님, 저는 지금도 몹시 괴로운 마음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를 몰아내려는 마음과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일말의 믿음이 이 작은 품속에서 쾅쾅 소리를 내며 싸우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와 술자리를 몇 번 함께한 그의 친구들은,

“한 번만 더 그를 믿어봐.”

라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서, 그들의 말 역시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돼버렸습니다. 하루는 ‘너도 그 사람이 시켜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년이 누구기에 그래, 그렇게 예뻐? 나 같은 여자는 눈에도 안 들어올 만큼?’이라며, 다소 유치한 모습으로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멋졌던 그의 푸른 입가가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참 미웠습니다.

선생님, 저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사람을 영영 못 믿게 돼버린 걸까요? 또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예? 소설이나 동화 얘기를 하는 거냐고요? 아니요, 맨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건 실제로 내게 일어난, 아주 사소한 연애담임을 알려드립니다.

말하고 나니 조금은 기괴한 이야기인 것 같긴 하지만요.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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