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민
제3시민
2016.11.23 18:24 by 오휘명
(사진:218904967/shutter.com)

결국 오늘 불독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 열한시 이후의 대합실에는 ‘주민’들의 체취와 그들이 마시는 술 냄새가 가득해, 가만히 앉아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몽롱해지곤 했다. 나아가 누워있으면 또 어떤가, 그 몽롱한 기운은 지독한 숙취처럼 더욱더 맹렬하게 나를 덮쳐오곤 했다.

그 느낌은 비단 나뿐만이 느끼는 게 아니었기에, 한밤중의 역 대합실에서는 사실 제정신인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어젯밤, 우리 중의 한 명이 가까스로 불독이 피를 뿜고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땐, 우리는 이미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철도공안이 짐짓 여유로운 말투로 구급대를 불렀다. 들것에 실려 어딘가로 떠나가는 불독의 입술은 4호선 노선도의 색깔처럼 푸르딩딩했다.

불독은 서울역에서 제법 잔뼈가 굵었던 주민이었다. 대합실 정 중앙, 대형 TV 앞의 긴 나무 벤치들을 차지할 만큼 중심이 되는 세력은 아니었지만, 좀처럼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거지는 또 아니었던 것. 마음씨도 나쁘지 않아, 가끔 구걸한 돈이 넉넉한 날이면 나와 같은 주변 노숙인들을 몇몇 불러 소주를 베풀기도 했던 그였다.

정말 겨울은 겨울인지, 국이 끓는 은색 국통에서 제법 희뿌연 김이 펄펄 휘날리는 게 보인다. 점심 배급은 서울역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오늘의 식사 분위기는 다른 날보다도 사뭇 어수선했다. 아마 모두가 불독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호탕하게 소리를 내며 웃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오늘은 여러모로 마음이 춥게 생겼다.

그렇지만 객사한 이를 추모하는 것들은 우리뿐, 역을 ‘거쳐 갈 뿐인’ 일반의 사람들은 어젯밤 이곳에서 누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안다 해도 그저 가던 길을 갈 것이 뻔하다.

*

서울역에는 참 많은 사람이 오간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줄지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를 피한다. 그런 이들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는 건 어떻게 보면 헛수고다. 그들은 우리를 거리 위의 비둘기쯤으로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엊그제에는 이곳 생활을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신입이 밍크를 두른 귀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가 뺨을 호되게 맞기까지 했다. 그보다는 적당히 수수하고 깔끔한 차림새의 사람들을 노리는 것이 낫다.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저 사람을 예로 들어볼까, 나이는 50대 중반, 안경을 썼다. 나이에 비해 퍽 세련된 회색 글렌체크 수트를 걸치고 있다. 어깨의 선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태리식 정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보라색 알맹이가 빛나는 넥타이핀이 햇빛을 받아 나의 시선을 찌른다. 저런 사람은 열에 아홉은 결벽증 환자인 경우가 많다. 돈을 주기는커녕 나의 주변을 빙 돌아 지나쳐갈 것이다.

그가 더욱 가까워진다.

봐라, 과장된 동선으로 나를 피해가지 않는가.

*

‘알 만큼 안다는 것’은 거지들에게는 일종의 저주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세련되고 지적인 것들을 맛본 적이 있고, 더럽지 않은 것들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그런 것들을 맛볼 수 없음에, 더러운 것들에 점점 익숙해져 감에 불행함을 느낀다. 역 광장에서의 점심과 남대문 방향 출구에서의 저녁 사이, 간식으로 산 빵을 씹으며 오늘도 나는 나락과도 같은 절망감을 느낀다. 싼 것을 영위하는 삶은 이토록 비참하다. 아무런 건더기와 잼도 들어가 있지 않은 빵의 맛. 이제는 익숙해져 가는 맛. 나는 아마 앞으로도 과거의 세련된 것들을 다시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때는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인생이 빛나는 시기도 있었다. 손을 대는 것마다 돈이 되던 때. 집에 금붙이 따위를 쟁여두던 때. 그렇지만 나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까마득한 추락을 경험했고, 이렇게 ‘알 만큼 아는 거지’가 됐다. 온갖 사치스러운 것이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지만, 저 중에 내 것인 것은 없다. 이것은 저주다.

*

작은 바람일지라도 꼭 머물다 떠나가는 골목길의 구석처럼, 사람이 반드시 맴도는 구석에 우리는 자리를 잡는다. 앉아만 있어도 돈은 들어온다. 운이 좋은 날에는 십만 원에 가까운 돈이 들어오기도 했다.

앉아만 있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생계는 어떻게든 이어가는 것이다. 노숙자들이 굶어 죽는 일은 이제 좀처럼 없다. 노숙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죽는다. 주로 술로 자신을 죽이거나, 어제의 불독처럼 본래 갖고 있던 질병으로 인해 죽을 뿐이었다.

앉아만 있어도 생계가 이어진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일을 할 의지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산은 축적되지 않지만, 더는 잃어지는 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썩고 썩다 굳어지고 마는 기름때처럼 이곳에 눌어붙게 되는 것이다. 나태함은 우리의 또 다른 질병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요즘 따라 유아 놀이방과 역사무실 주변을 서성거리곤 하는 여자의 몸짓들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무슨 사연으로 노숙자가 됐는지 모를, 많이 쳐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그녀는 내 팔뚝 정도로 보이는 갓난아이를 안고 다닌다. 하루는 그 모자母子의 춥고 배고픈 겨울나기가 안쓰러워 우유를 한 병 사다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눈이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그녀는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곤 한다. 그 이후로 나는 몇 번쯤 그 모자와 가족을 이루는 꿈을 꿨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이곳에 익숙해진, ‘눌어붙은 기름때’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아마 내가 집과 직장을 얻어,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품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무실의 앞에 주저앉은 여자와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웃는다. 나는 따뜻한 미소를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가난함을 느낀다.

*

밤 열한 시가 넘어 막차가 끊기고, 서울역의 대합실은 다시 하이에나들의 시간이 된다. 저녁으로 나온 콩나물국밥을 ‘미리 하는 해장’으로 여기는 건지, 대합실의 이곳저곳에선 슬슬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역한 소주 냄새와 체취들이 한 데 섞여, 다시금 몽롱한 기운이 감돈다.

오늘은 ‘모두가 무사한 밤’이 될 수 있을까. 불독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던 자리는 금세 신입이 차지해버렸다. 그래선 안 되지만, 나는 그 신입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상상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니, 사실은 모르는 일이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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