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
상처받은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
2016.11.24 17:29 by 지혜

앤서니 브라운 쓰고, 그린 <숲 속으로>

“엄마가 동생 낳아줄까?”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초록이는 두 눈을 똥그랗게 하고 대답한다. “아니. 왜냐하면 난 벌써 동생이 있잖아.”

아이가 말하는 동생은 가끔 만나는 사촌 동생이다. 초록이는 다섯 살, 사촌 동생은 두 살이다. 두 살은 참 귀엽다. 아장거리는 발걸음, 입 안에서 또로록 굴러가는 옹알이, 심지어 떼를 쓰느라 땅에 드러누워 우는 모습까지 귀엽다. 물론 초록이도 여전히 귀엽다. 하지만 귀여움이란 더 작고 여린 것들의 특권이므로 온 가족의 관심은 사촌 동생에게 쏠린다. 이럴 때마다 나는 급하게 초록이 표정을 살핀다. 다섯 살 아이답게 얼굴에는 그 마음이 온전히 드러난다. 눈을 깔고 땅만 보거나 입을 삐죽대기도 하고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울기도 한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애정과 관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마땅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혹시 서러운 마음이 상처로 남을까 걱정도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진:SanchaiRat/shutterstock.com)

갖가지 공포로 밤이 몹시 무서운 나이일 때, 잠들려면 작은 십자가와 동생이 필요했다. 십자가는 작은 종의 손잡이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네 집 거실 한쪽에 떨어져 있던 그것을 주워 와서 무서울 때마다 손에 쥐고 잤다. 그다음은 동생이 내 옆에 있어야 했다. 날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그 숨소리를 들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십자가와 동생이 있어 밤은 견딜 만했다.

어느 날, 밤에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봤지만 모르겠다는 무심함이 돌아왔다. 다른 날보다 십자가를 더 꼭 쥐고 있어야 했다. 아침이 되자 동생은 외삼촌이 깨워서 나갔더니 외삼촌 친구들이 맛있는 것도 사주고 선물도 주고 재미있게 놀아줬다, 고 자랑을 했다. 동생은 애교도 많고 순해서 평소에도 친척들이 참 예뻐했다.

  

삼촌은 왜 나는 두고 갔을까.

동생 얘기를 듣는 내내 이 생각만 했다.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와서 머릿속에서 묻고 또 물었다.

사람들은 왜 자꾸 나만 두고 갈까.

엄마가 내 표정을 살피는 그 순간에 나는 열심히 웃었다. 사실 울고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동생은 씩씩한데 언니가 또 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울거나 화를 내면 정말 미운 아이가 될까봐.

이렇게 쓰고 보니 별거 아닌데, 이날의 장면들은 아주 오랫동안 날 괴롭혔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고 미운 아이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착하고 예쁜 사람이 되려고 했다. 스스로를 다그치는 참 힘든 목표였다.

그러니 혹시 내 아이도 서러운 기억을 안고 긴 시간 힘들어 할까봐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엄마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초록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행복한 기억만 남겨줄 수는 없을까.

나의 질문에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숲 속으로>는 ‘없다’고 대답한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숲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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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아픈 할머니에게 케이크를 갖다 드려야 한다.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멀리 돌아가는 길인데 시간이 엄청 걸리고 또 하나는 숲을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이다. 혼자 걸어야 하는 길, 그러니까 홀로 감당해야 할 삶을 앞에 두고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숲으로 가지 말고 멀리 돌아가라고 당부한다. 세상의 엄마들은 나의 아이가 힘들고 고된 길을 걷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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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년은 어둡고 거친 숲을 선택한다. 거대한 그늘로 다가가는 소년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외롭다. 숲을 걸으며 소년은 다른 아이들을 차례로 만난다. 아프고 소리치고 울부짖는, 흑백의 아이들이다. 이 숲에서 선명한 색을 지닌 것은 오직 소년뿐이다. 어쩌면 이 숲은, 그리고 아이들은 소년의 마음속 깊이 담아둔 상처받은 기억들이 아닐까. 상처받은 기억들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무엇인가 바라지만 소년은 오히려 묻는다. “하지만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 기억은 선택하고 정리하고 버릴 수 없다. 기억이 떠오르면 그저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럼에도 이 그림책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상처받은 기억도 ‘끝’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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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소년은 숲을 오래 헤매지 않는다. 따뜻한 할머니의 집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할머니의 집도 묵묵히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할머니 집을 찾았을 때, 긴 여정의 끝을 알리듯 하얀 눈이 숲을, 상처받은 기억들을 덮는다. “잘 지냈니?” 안부를 묻는 할머니에게 소년은 “네, 이젠 괜찮아요.” 라고 대답한다. 어둡고 거친 숲 속에서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결국 밖으로 나온 소년을, 나도 꼭 안아주고 싶다.

숲을 덮고 있는 하얀 눈은 언젠가 녹을 것이고 상처 받은 기억들은 소년에게 다시 말을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한번 걸었던 숲에서 나오는 일은 조금 더 쉬운 법이고 그렇게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오늘 밤, 초록이와 같이 이 그림책을 보며 말해줘야겠다.

"초록이도 이 친구처럼 어둡고 거친 숲에 혼자 남게 되는 일이 있을 거야. 그 숲 속에서 초록이를 괴롭히는 아픈 기억들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럴 때는 우리 집을 생각해.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결국 따뜻한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엄마는 집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가 네가 돌아오면 꼭 안아줄게. 초록아, 다 괜찮아."

  Information

 <숲 속으로> 글·그림: 앤서니 브라운 | 역자: 허은미 | 출판사: 베틀북 | 발행: 2004.06.30 |가격 11000원(원제 Into the Forest)

/사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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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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