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노릇을 위한 수업료
사람 노릇을 위한 수업료
사람 노릇을 위한 수업료
2016.12.14 10:32 by 류승연

아들이 처음으로 장애 판정을 받던 3~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좀 느린 아이’에서 ‘진짜 장애인’이 됐으니 얼마나 놀라고 정신이 없었을꼬. 무엇보다 정보가 부족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를 가야 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소문해서 대학 선배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다리 건너 언니가 자폐아들을 키우며 산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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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에 얼굴만 몇 번 스치며 본 후배에게 언니는 세심히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엄마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큰 위로가 되었지만, 그 이후 언니가 줄줄이 쏟아내는 말들은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일단 장애인 세계에 입문하고 나니 받아야 할 치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언어, 작업(감각통합), 놀이, 재활, 인지, 심리, 음악, 체육 치료 등 아이가 받아야 할 치료들은 끝이 없었다.

한숨을 쉬는 내게 언니가 말을 한다.

“장애인 엄마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어. 한 달에 100만 원을 투자하면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3~4살 수준의 학습능력밖에 못 갖게 되지만, 200만 원씩 투자하면 3~4학년 수준까지는 자랄 수 있다고. 3~4학년만 돼도 한글 읽을 줄 알고 더하기 빼기 다 할 수 있으니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거지.”

마흔 살에도 세 살 아기의 모습으로 사는 자식을 남겨 두곤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 자식 걱정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길 밥 먹듯 할 게 뻔하다.

그래. 3학년만 돼도 괜찮겠다. 파란 불에 횡단보도 건널 줄 알고,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고, 세탁기도 돌리고, 보일러도 틀 수 있으려면 3학년 수준까지만 되게 아이를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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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모르겠다. 이제부턴 허리띠를 졸라매야지. 외식도, 여행도, 문화생활도 당분간은 안녕~. 내 인생의 봄날이 이렇게 가는구나. 찬란했던 젊은 날이여~ 굿바이 짜이찌엔~.

이후 나는 눈에 띄는 치료실마다 대기 신청을 걸어놓고 순서가 되어 연락이 올 때마다 냅다 아이를 등록시켜 치료를 받게 했다.

아들 앞으로 100만 원을 쓰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건, 바우처 카드를 통해 한 달에 8번 치료를 받는 게 전부. 바우처 카드로는 한 군데의 치료실에서 언어치료를 받았고, 그 외의 다른 치료비용은 모두 생활비 통장에서 나가야 했다.

지역과 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과목에 상관없이 30분짜리 수업 1회 당 4만원씩의 치료비가 일반적이었다. 내가 보기엔 바닥에 누워 짜증만 부리다 장난감 몇 개에 눈길 한 번씩 준 게 다인데 30분이 지나가곤 했다.

치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아들에게 말하곤 했다. “오구오구 우리 아들, 오늘도 8만 원을 허공에 날리고 왔어요? 오늘도 치료실 전기세 내주고 왔어요? 오구오구.”

교통비 부담도 상당했다. 치료실에 셔틀버스가 다니는 것도 아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여러 상황상 부득이하게 택시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A 치료실까지, A 치료실에서 B 치료실까지, B 치료실에서 집까지. 하루 3번의 택시를 이용해야 했는데 그 돈도 만만치 않았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우리 아들은 해당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었다. 장애 등급별로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 아들은 1등급은커녕 특등급을 줘도 모자랄 인지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 좋아서 2등급을 받았다. 네 살짜리의 사회성이란 게 뭐 있겠노. 어른들을 보고 얼마나 방긋방긋 잘 웃느냐겠지. 암튼 의사 선생님과 치료사들 앞에서 잘도 웃어댄 덕에 2등급을 받아 장애인 콜택시도 사용 못 하고, 장애인 주차증도 못 받게 되었다. 쩝.

어쨌든 그렇게 바쁜 치료실 생활은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 작년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치료실에 다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작년 여름, 구청 앞마당에서 어린이 대잔치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더니 거대한 야외 풀장과 함께 미니 바이킹과 회전목마 등 아기자기한 놀이기구들이 마련돼 있다.

물놀이에 지칠 때쯤 아이들을 바이킹에 태웠다. 쌍둥이 누나에게 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잘 보라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다. 자. 출발. 앞으로 슝~. 다시 뒤로 쓩~. 이번엔 좀 더 멀리 앞으로 슈우웅~. 다시 뒤로 슈우웅~.

생전 처음 접해보는 낯선 감각에 아들이 놀란다. 하지만 이내 뭔가 야릇하고 오묘한 느낌, 공중에 몸이 뜨는 것도 같고 배꼽도 간질간질한 듯한 그 느낌에 푹 빠져든다. 앞으로 뒤로 바이킹이 움직일 때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들의 표정이 나온다. 웃음이 나는데 자기도 어쩔 줄 모르겠어서 입이 막 벌어지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다.

바이킹이 주는 그 낯선 경험이 너무나 좋았던 아들은 이후로도 엄마 옷을 잡아당겨 6번을 더 탔다. 그 날 저녁 바이킹을 탈 때 찍었던 사진들을 보며, 7년간 아들을 키우면서 처음으로 접하는 낯선 표정들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했다.

언어치료, 놀이치료, 심리치료, 작업치료… 등등등. 그래 좋아. 다 좋은데. 어차피 아들이 살아나갈 인생은 치료실 안에서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니까. 사회 속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부모와 함께 미리 앞서 반복 경험해 보는 게 아이한테는 더 좋을 수도 있겠구나.

물론 치료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치료를 빼먹고 인사동 나들이를 하고,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공연을 보러 다니고, 지하철과 버스 여행을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지. 치료실에 돈 많이 갖다 바치는 걸로 위안을 삼거나 치료 지상주의에 물들어 좋다는 온갖 치료는 기를 쓰고 찾아다니는 그런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이런 심정을 SNS에 올렸더니 아들의 작업치료를 맡고 있는 치료사 선생님이 “어머니 글에 공감입니다”라며 글을 남긴다.

자신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고. 장애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곳은 치료실이나 학교처럼 세팅된 환경도 아니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어른들이 항시 대기하는 곳도 아닌데 어떻게 하는 게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는 걸까 고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 이후, 바이킹 위에서 처음 보는 아들의 표정을 접한 이후, 나는 치료실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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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생활을 거의 마쳐가는 지금은 작년에 비해 여유롭다 할 정도로 치료 횟수를 많이 줄였다. 유치원과는 다른 분위기의 학교생활이 힘들어서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때론 평일에도 어디든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는 부지런한 가족이 되었다. 전시회도 가고, 공연도 보러 가고, 물놀이장과 극장도 다녔다. 인사동도 가고, 삼청동도 가고, 이태원과 홍대도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걸어 다녔다. 갈 곳이 없을 땐 대형마트와 대형 서점 등에 가서 하루를 보내기도 일상다반사.

무엇보다 치료비를 줄이니 외식을 할 비용이 대폭 늘어났다. 저녁 한 끼 안 차리고 외식 핑계로 시내에 나가 콧바람 쐬는 즐거움을 누리니 내 마음도 행복해지고, 엄마와 아내가 행복해지니 가정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아들은 어떻게 됐냐고? 여전히 말 한마디 못하고 외계어만 쏟아내고 있다. 아직도 숟가락질을 혼자 못하고 옷도 혼자 못 입는다. 하지만 아들은 더 행복해졌다. 치료실만 다니던 예전보다 짜증이 눈에 띄게 줄었고, 집 밖을 나가 세상 속에서 만물을 보며 걸어 다니는 재미도 알게 되었다.

한 달 200만원씩은 투자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안 가본 길이니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난 치료 수를 줄이고 더 많이 돌아다니는 걸 택한 지금의 방식이 더 좋다. 사람 구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들이 더 행복해졌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 방식을 고수할 생각이다.

아, 이번 주부터 언어치료는 횟수를 늘렸는데 그건 예외.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좀 해야 하니까!^^

(사진:CHOATphotographer/shutterstock.com)

/사진:류승연

동네 바보 형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장애인 월드’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에피소드별로 전합니다. 모르면 오해지만, 알면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런 비장애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필자소개
류승연

저서: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전)아시아투데이 정치부 기자. 쌍둥이 출산 후 180도 인생 역전. 엄마 노릇도 처음이지만 장애아이 엄마 노릇은 더더욱 처음. 갑작스레 속하게 된 장애인 월드. '장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깜놀. 워워~ 물지 않아요. 놀라지 마세요.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생긴 오해는 알면 풀릴 수 있다고 믿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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