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내일
모두의 내일
2016.12.27 16:42 by 오휘명
(사진: click49/shutter.com)

“그이 새해 목표가 또 금연이래. 몇 년째인지 몰라. 며칠 안에 또 피워댈 거면서, 호호.”

“여보세요? 네, 단장님. 1월 공연 곡들은 당연히 연주할 수 있습니다. 비록 차 선배의 빈자리를 메우는 느낌이어도 상관없어요. 연주만 할 수 있으면요, 네. 네. 지금은 동생이 있는 병원이에요.”

“그러니까 현섭 씨가 하는 말이, 나 같은 여자는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다시 합칠 생각이 없다고…….”

12월 31일, 아파트 단지와 번화가 사이에 위치한 대학병원 건물의 1층 카페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오간다.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이헌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러한 목소리들을 그대로 흡수하며 수수한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정기 건강 검진을 받으러 온 56세 주부의 남편을 흉보는 소리, 경력도 실력도 애매한 시향 신입 단원의 절박한 통화내용, 실연을 당한 710동 김 양의 울먹임……. 이헌이 일하고 있는 카페는 병원의 로비에 있었지만, 아파트와 번화가가 주변에 위치한 환경 탓에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찾는 곳이었다. 이헌이 ‘블랙’커피를 주문한 할머니 네 분을 위해 에스프레소 샷을 뽑고 있을 때였다. 카페의 유리 미닫이문이 열렸는지 찬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납품 할아버지’였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어요. 연말인데 고생 많으시네요. 옷도 그렇게 얇게 입으시고.”

머리카락이 온통 하얗게 센 남자가 일회용 컵이니 컵 홀더 같은 것들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으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는 이헌이 ‘사장님’ 또는 ‘납품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으로, 작게 카페 용품을 납품하는 독거노인이었다. 가계 사정이 빠듯한지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매번 이헌의 눈에 밟히곤 했었다.

“네, 서명했습니다. 어르신, 잠시만 앉아 계세요.”

이헌은 그렇게 말하곤 준비하던 음료들을 잠시 뒤로 미뤘다. 노인을 위한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더 후끈후끈한 기운이 돌 수 있도록, 달콤한 시럽을 듬뿍 담은 특제 커피였다.

“안 줘도 된다니까 그러네. 총각 월급 끌어서 만드는 걸 텐데.”

그가 다디단 커피를 만들어서 줄 때마다 노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빠듯한 형편 탓에 몇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잘 사 마시지 못하는 그였기에, 이헌의 그러한 호의는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매번 병원 카페에 납품을 마칠 때마다 커피를 얻어 마시고 나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루의 남은 일과가 더욱 가뿐하고도 따뜻한 것 같았다. 노인은 오늘도 이헌이 만들어준 커피를 손에 든 채로 병원 건물을 나섰다. 날씨는 흐렸다. 오후 두 시, 저 멀리의 해는 보일 듯 말 듯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새해가 코앞이었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보이지 않는 미래, 몇 해 전 자신을 두고 떠난 부인처럼 자신 역시 언제 차갑고 좁은 방에서 생을 마감할지 모를 일이었다. 따뜻한 커피를 만들어준 청년에 대한 감사함과 차가운 현실, 새롭게 다가오는 한 해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했다.

*

저녁 여섯 시, 이헌은 카페의 철제 셔터를 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토요일이었던 탓에 병원의 외래진료는 진즉 끝나있었고, 로비에는 입원 환자와 병원 직원들만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심심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연말연시라고 떠들어대도 나한테는 별반 다를 게 없군. 얼마 전의 성탄절 역시 커피를 만들며 하루를 고스란히 보낸 그였다.

유난히 적막한 것 같았던 저녁, 병동 본관을 지나쳐 부속 장례식장을 지날 때였다. 이헌은 장례식장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그곳을 지나칠 때면 한결 경건한 마음가짐이 되곤 했었다. 그렇지만 오늘 그곳의 분위기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그의 귀에 파고들고 있었다. 아이고 내 딸, 아이고 내 새끼…….

딱하지, 검은 상복을 입은 중년의 여성이 식장 바깥의 계단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이헌은 봐선 안 되는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급히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딱하군, 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 같은데, 심지어 새해를 앞두고.’

이헌은 일 년과 일 년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누군가를 향한 애도를 표하며 집을 향해 걸었다.

거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갓 태어났을 법한 아이를 품에 안고 걷는 여인,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 벌써 한 잔을 걸쳤는지 소란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무리가 있었다. 여러 설렘과 씁쓸함들로 뒤죽박죽인 거리였다.

밤 열한 시, 이헌은 자신의 작은 방에서 이부자리를 폈다.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새해 카운트다운을 한다며 호들갑이었겠지만, 올해의 오늘엔 왠지 그것들을 구경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방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참 별것도 아닌 하루였다는 생각을 하며.

*

깊은 숨을 몇 번 쉬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꿈속이었다. 그곳에서 이헌은 이헌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을까, 둥둥 떠 있는 기분과 함께 낯선 질량감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면이 아닌 공중을 제법 빠른 속도로 떠다니고 있었다.

언젠가 어릴 적에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자신이 사는 동네 주변을 날아다니는 모습. 이헌은 자신이 사는 단칸방을 지나, 아파트 단지와 대학병원, 그리고 번화가가 위치한 동네를 빠르게 떠돌고 있었다. 새벽인 듯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찬바람만 종종 불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속도를 조절할 수는 없었고, 외투 같은 것을 꺼내 입을 수도 없었다. 이헌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관찰자 시점과 비슷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아까 전의 장례식장이었다. 입구의 계단에서 울부짖고 있었던 여성은 울음을 멈춘 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헌은 그곳에 오래도록 머물 수 없음을 알고 짧게나마 애도를 표했다. 자신의 애도가 바람과 같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있다면, 그 눈물자국을 조금이나마 말려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장례식장을 나서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는 한 남자가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카페에서 56세 주부 손님을 통해 들었던, 매년 새롭게 금연을 다짐하는 남자였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 사람일 것이라는 어떤 확신이 들었다. 날짜는 오전 열두 시를 넘겨 1월 1일이었다. 새해가 된 지 몇 시간 만에 결심을 어긴 남자를 보며, 이헌은 왠지 모를 웃긴 감정을 느꼈다.
 

공연 기회가 절실한 신입 교향악 단원의 부르튼 손가락과 얼마 전 실연을 당한 여인의 울다 지쳐 잠든 모습을 차례로 구경했다. 어느새 제법 긴 시간이 흘렀는지 하늘의 색이 밝아지고 있었다.

낮은 산의 위로 1월 1일의 해가 떠오르고, 새해의 가장 빠른 햇살이 앙상해진 숲을 데웠다.

완전히 생을 멈춘 것처럼 보이는 나뭇가지의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생의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멈추는 것은 없었다. 새해가 온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생을 마감했고 다른 누군가는 갓 생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매년 똑같은 결심을 세웠다. 또 누군가는 지나간 사랑에 아파했다.

그렇지만 멈추는 것은 없었다. 세상은 ‘1년’이라는 특정 단위의 시간을 기점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세계의 흐름이라는 것은 나누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슬픔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기억하고 있다면 영원히 함께인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끝이 끝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 모든 외로운 이들에게도 축복처럼 시간은 흘러, 봄이 반드시 찾아들 것이었다.

이헌은 납품 할아버지의 골방에 들러, 그의 잠자리를 살펴드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꿈의 끝이었다.

잠에서 깼을 때 바라본 시계의 바늘은 오전 여덟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특별할 것도, 그렇지만 또 소소하지도 않은 1월 1일이 흐르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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