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라는 단어
끝이라는 단어
2017.01.06 11:45 by 청민

언제나 그렇듯 어느 평범한 밤이었다.

대학 주변의 조용한 카페에서 친구와 지뢰 찾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카페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한 진동이었다. 뭐야, 왜 이래, 카페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지진이야?’라는 물음표만 나올 뿐 그 누구도 확실히 ‘지진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다. 지진은 아주 먼 이야기였으니까, 이렇게 큰 지진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라 생각했으니까. 카페에 있는 모두에게 두려움이 내렸다.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어봐도 똑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카톡과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했다.

한참을 핸드폰과 씨름하고 있던 중에 다시 카페 바닥이 울렸다. 조명이 흔들리고 탁자 위 물건들이 요동쳤다. 처음보다 더 크고 긴 진동에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진이었다. 불안감이 커졌다. 내가 이곳에서 죽을 수 있겠구나. 처음 겪는 공포였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빠르게 나를 덮쳤다.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나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두 번의 지진이 지나간 후, 그 질문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죽음은 상상하지 못했던 평범한 순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06-1

친구 차를 얻어 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으로 무수히 떠올렸던 재난 영화의 장면들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도 무사했다. 땅이 흔들렸던 시각, 엄마는 마트에 계셨단다. 장을 보는데 마트 바닥이 두 번이나 출렁였다고.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엄마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밤이 늦어서야 지진에 대한 자세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긴장된 마음을 풀지 못한 채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별의별 상상이 다 들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그날 밤,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애는 까칠하고 무뚝뚝한 룸메이트였다. 웃으며 말을 걸어도 대꾸 한 번 없는,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친구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대학 시절 마지막 룸메이트로 스무 살짜리 그 애를 만났다. 그 애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첫 만남부터 정이 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예민한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어린 친구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랄까.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한 번씩 돌아가면서 청소를 하기로 해놓고 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 한번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놓았는데, 그 애가 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자기 침대에서 옷을 갈아입으면 밖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 잠시 창문을 닫으면 될 텐데, 그것도 아니면 화장실에서 갈아입어도 됐을 텐데. 허락도 받지 않고 내 침대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학교 기숙사에는 전통이 있었다. 학기 초, 한 학기 동안 사이좋게 잘 지내자는 의미로 룸메이트끼리 밥을 먹는 전통이었다. 당시 졸업을 몇 개월 앞둔 나는 돈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밥 사줄 돈이 없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혹시 월남쌈 좋아하면 방에서 같이 해먹을래?” 물었다. 그 애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일요일 저녁, 나는 그 애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숙사에 내려와 장을 보았다. 재료를 다듬고 집에서 싸온 밑반찬을 꺼내 상을 차린 뒤 그 애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 시간 삼십분 전에 문자 하나가 왔다. ‘언니, 저 갑자기 일이 생겨 같이 저녁 못 먹을 것 같아요.’ 문자에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지인에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 받았는데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단다. 약속을 취소하는 이유를 설명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날 일은 웃으며 넘겼지만 학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같이 밥 먹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 후 나는 졸업을 했고, 그 애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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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후배 E였다. “언니 혹시 그 애 기억나세요? 언니 룸메였던.” E와 그 애는 적당히 아는 사이였단다. “걔, 지금 교통사고 당해서 혼수상태래요. 굉장히 위독한 것 같더라고요.” 멀쩡히 길을 걷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E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졸업하고 처음 듣는 그 애의 소식이 하필 이런 거라니. 전화를 쥐고 있던 손이 떨렸고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같이 살 때엔 궁금해 하지 않았던 그 애에 대한 것들을 E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질문에서부터 그 애는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까지.

E를 통해 들은 그 애는,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진심을 다해 살던 사람이었단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해냈으며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긴 사람이었다고.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야, 내가 그 친구를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전해준 E의 목소리가 떨렸다. “언니 그 애, 부모님이랑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대요.” 그 말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반년 동안 나랑 같은 방에서 지내던 친구였는데. 전화를 끊은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보냈는데 그 애는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니. 정신이 멍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E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 애의 부고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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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지진을 겪고 나니 그 애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 애가 떠나던 날, 그 애는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카페에서 겪은 지진이 나를 삼켰다면 나도 그 애처럼 작별 인사를 남기지 못했겠지. 끝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쉽게, 아무것도 아닌 어느 날 내게 찾아왔다. 두 번의 지진과 함께. 지진을 떠올리며 글을 쓰는 내내, 다급하게 엄마에게 전화를 걸던 순간이 떠올라 쉽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지진이 더 세게 카페를 흔들었다면, 그래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수 없었다면, 나는 ‘내가 죽는 것’과 ‘엄마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 중 어느 쪽을 더 안타까워했을까.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끝에 가서야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엄마와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나는 언제나, 그 말을 해야만 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불고, 나에게도 불어오고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 후에 마음 아픈 사람, 인생이 버겁기만 한 사람, 사랑이 어렵다고만 느낀 사람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기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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