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판타지
모스크바 판타지
2017.01.19 20:08 by 청민

모스크바만 생각하면 마음이 시큰거린다. 요령이 없어 망쳐버린 어린 날의 첫사랑처럼, 설레면서 아쉽기만 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많은 것을 잃어버린 나의 오래된 도시. 그래서일까. 모스크바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괜히 얼얼하다.

001

‘첫’이 붙은 모든 단어가 싫었다. 첫사랑, 첫 유학, 첫 여행, 첫 만남. 나에게 ‘첫’은 늘 실패였다.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 없는, 내겐 실패의 상징인 ‘첫’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겐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아련하게 포장되는 것 같아 더 싫었다. 첫사랑엔 보기 좋게 실패했고, 첫 여행에서는 친구와 마음이 상해 돌아왔으며, 첫 만남에서는 늘 어설프게 낯을 가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곤 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요령이 없어서, 나는 처음 하는 모든 것을 까맣게 기억했다. 분명 좋았던 장면도 많았을 텐데 굳이 창피한 순간만을 되새기곤 했다.

나에게 모스크바는 ‘첫’의 집합소였다. 첫사랑을 뺀 온갖 처음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이랄까. 내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다면 모스크바에 살았던 시간들은 아마 유난히 때가 타고 낡았을 것이다. 물을 쏟아 우그러진 종이, 떡볶이를 먹다 튄 얼룩, 몇 페이지인지 알 수 없게 찢어진 귀퉁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 둘에게 모스크바는 갑작스레 찾아온 소나기 같았다. 어쩌다가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고 모스크바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반년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썩 마음에 들면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페이지를 만들어냈다.

모스크바의 첫 페이지는 이상하리만큼 외로웠다.

모스크바라는 이름이 주는 쓸쓸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곳에 있는 내내 도망가고 싶었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얀데 나만 까만 점으로 남아 설원의 유일한 이물질이 된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자주 아팠다. 모스크바에서는 유독 뜬금없이 아팠고, 이유 없이 다리의 관절들이 쿡쿡 쑤시는 날이면 나는 정확히 하루 반나절을 앓았다. 그럴 때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 까만 돌이 되었다. 동기들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지만 어설프게 그들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워 깜깜한 천장만 바라보던 시간, 하얀 설원으로 둘러싸인 모스크바의 작은 방으로 밤의 어두움이 다 몰려 들어왔다.

002

모스크바의 두 번째 페이지는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행의 끝에 아무것도 없을까봐 두려웠고, 모스크바에서 겪는 경험들이 부모님의 재정적 희생보다 나은 값을 할 것인지 아니 적어도 그만큼의 값을 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두려웠다. 매달 엄마에게 용돈을 받을 때마다 미안함이 앞을 가렸다. 내가 마치 쓸데없는 사람이자 돈 먹는 하마가 된 것 같았다. 하필 러시아 화폐가치가 최고조로 올라갔을 때였다. 학교를 왕복하는 버스비와 매달 내는 집세만으로도 엄마에게 받은 용돈 대부분을 써야 했다. 남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미안한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모스크바의 세 번째 페이지는 두 번 다시 열어보고 싶지 않은 감정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피부로 느끼는 러시아가 낯설었고, 늘지 않는 러시아어 실력에 답답했으며, 강해 보이는 러시아인들이 무서웠다. 처음 인종차별을 당했던 날 나는 무채색처럼 거리를 활보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미웠다. 러시아어에 능숙했다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줬을 텐데. 언어의 한계로 참아야 하는 만큼 조잔한 분노가 치밀었고, 그때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나를 더 외롭게 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쏟고 싶었다. 나는 작은 소란에도 길지 않은 모스크바 생활을 뒤로 하고 돌아갈 생각부터 들었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었다. 겁쟁이, 도망자라는 이름의.

나는 모스크바의 페이지들을 펼쳐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창밖으로 쌓이는 눈을 구경할 때면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도 했다. 커튼을 친 아침의 풍경은 까만 돌이 되었던 나를 새하얗게 덧칠하는 듯 했다. 때가 타 회색빛으로 변한 어제의 눈 위에 새롭게 쌓이는 눈을 창가에 앉아 한참 동안 구경하다 보면, 마치 판타지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눈처럼 매일 새로워지고 싶다는 소원이 이뤄질 것도 같았다. 언제나 ‘첫’에 실패하지만, 모스크바의 나는 까만 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전날까지 쌓였던 막연한 까만 감정들을 정화시키곤 했다.

003

돌아보면 새하얗게 내리던 눈과 까만 나는, 아침마다 판타지가 펼쳐지는 창문을 사이에 두고 바둑을 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먼저 까만 돌을 놓으면 창밖에서 내리는 눈은 하얀 돌을 놓으면서. 내가 먼저 두려웠던 순간 하나를 떠올리면, 흰 눈은 모스크바에서 즐거웠던 추억 하나를 내어 놓고. 내가 불안함 하나를 풀어 놓으면, 흰 눈은 또 모스크바에 처음 와서 호기심 가득했던 내 모습 하나를 내어 놓고. 우리는 각자의 돌을 하나씩 놓으며 모스크바 판타지라는 페이지를 채웠다.

그때의 마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좋으면서도 밉고, 미우면서도 마음이 쓰이던. 떠올릴수록 애틋하면서 아쉬운 기억, 창가에 앉아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을 구경하던 설렘, 그리고 딱 그 정도 크기의 외로움. 이 모순적인 감정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할까. 똑 부러지게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하게 간직하고 있는 까만 마음을, 나는 사랑 말고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작은 것에 기죽고 별 것 아닌 말에 눈물 훔치던 모스크바의 낡은 페이지들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나의 까만 마음들은 어디로 버려지는 걸까. 비록 사랑보다 미움이 더 많았다고 해도, 사랑이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는다 해도.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불고, 나에게도 불어오고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 후에 마음 아픈 사람, 인생이 버겁기만 한 사람, 사랑이 어렵다고만 느낀 사람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기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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