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의 바다
그 애의 바다
2017.02.03 17:52 by 청민

‘기차 타고 가, 버스 타고 가?’ 경주 여행을 간다니까 그 애가 물었다. 나는 어느 것도 상관이 없다 했고, 그럼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 애는 말했다. 차분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그 애가 목에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설명했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서,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서는 100번 버스를 타. 바다 가는 버스야. 산을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는 길이 참 예뻐. 오래 걸리지만 길이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야. 한 시간쯤 가다가 내리면 작은 슈퍼 하나가 보이는데, 슈퍼 뒤쪽으로 걸어가면 바다가 나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야.”

그 애는 자기가 가장 좋아한다는 바다를 대뜸 알려 주었다. 가는 길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슈퍼의 존재까지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시간 되면 가봐, 그러면 내가 말한 바다에 도착할 수 있어, 하고. 그 애와 내가 대화를 나눈 것은 기껏해야 세 번째. 그 세 번 만에 나는 그 애가 가장 좋아한다는 바다를 알고야 말았다. 누군가의 비밀 일기장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든 나는 조금은 들떠 “꼭 가볼게, 고마워.” 하고 씽긋 웃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25분마다 오는 버스였는데, 하필 버스정류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버스는 떠나 버렸고, 나에겐 계획에 없던 25분이 남았다. 해가 유난히 내리쬈고 바람도 많이 불지 않아서 두꺼운 옷을 입고 온 내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기분 전환으로 꽃이나 살까 싶어 꽃집에 들어가 안개 꽃 반 단을 샀다. 한 단을 온전히 들고 다닐 재간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처음 가는 여행지에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하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안개꽃 반 단을 품고 기다리던 100번 버스에 올랐다.

모든 것이 그 애의 말 대로였다. 아름다웠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산과 산이 연결되고, 산 너머의 하늘이 풍경을 완성시켰다. 여름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는 나뭇잎들은 세상의 모든 생기를 끌어 모아 스스로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초록을 끌어안는 생명력이, 깊은 땅속에서부터 뿌리를 내려 잎을 피우는 듯 했다. 그 애가 괜히 이 길이 예쁘다고 한 것이 아니었구나. 버스를 타고 잘 모르는 곳으로 가는 동안,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도 만들어냈다. 초록은 그런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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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타고 퍼지는 노래와 눈부신 초록 풍경 때문에, 그 애가 말한 정류장을 하나 지나쳤다.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이번 정류장에 내려서 뒤로 조금만 걸어가면 아가씨가 말했던 슈퍼가 나올 거라고 하셔서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버스에서 튕겨지듯 나왔고, 슈퍼를 찾아 길을 되돌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와 그 애가 말한 작은 슈퍼가 눈에 들어왔다. 슈퍼 뒤를 따라 들어가니, 그 애의 바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멀리 빨간 등대도 보였다. 그 애가 가장 좋아한다는 바다가, 내 앞에 빤히 펼쳐졌다.

그 애와 나는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나는 알바였고 그 애는 직원이었다. 서로 얼굴만 알던 사이였는데 한번은 그 애의 안색이 좋지 않아 물어보니 몸살 기운이 있다 했다. 누군가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지만 그냥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그때였다. 나는 가까운 약국에 가 몸살 약을 사서 나도 요즘 몸살이라서, 라는 투박한 말로 약 봉지를 건넸다. 그렇게 몇 번 각자의 일상에서 위로가 필요한 타이밍에 희한하게도 서로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게 되었고, 우리는 어색하지만 괜찮은 동갑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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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의 바다는 더없이 예뻐 보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그 애의 말투를 닮은 듯 했다. 나는 그 애가 가장 좋아한다던 바다가 썩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한 풍경, 몇 없는 사람들, 바다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 들리는 것이라곤 파도가 잔잔하게 부서지는 소리와 해변을 걷는 내 발자국 소리,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며 웃는 소리. 온갖 소리가 서로 거슬리지 않게, 담담하고 차분하게 공간을 채웠다.

해변에는 몇 개의 높은 수상구조망루가 있었고 나는 기어코 거기에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해변의 끝과 끝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해변을 채우는 둥근 자갈,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흔적들. 해변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을 보다가, 이곳을 스쳐 지나간 누군가가 남긴 흔적이란 생각에 괜히 뭉클해졌다. 그 애의 흔적도 여기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 그 애는 왜 이 바다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정면으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을 맞으며, 문득 그 애가 궁금해졌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바다를 보다가 나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이곳에 오게 된 건지를 생각했다. 좋아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이 도시에 와서, 잘 알지 못하는 꽃집에서 안개 꽃 반 단을 사고, 잘 알지 못하는 버스에 올라, 잘 알지 못하는 바다를 보러 왔다. 이 모든 것은 잘 알지 못하는 그 애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난 그 애의 무엇을 믿고 홀리듯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래도 이 바다가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꼭 베일에 싸인 누군가의 흔적을 엿보는 것 같아서, 썩 황홀하기까지 했다. 여행이란 이름으로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설렘으로 찾아왔고, 그 순간의 나에겐 설렘이 참 귀하고 소중했다.

사람과 여행이 닮았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사람을 여행하고 싶다. 잘 알지 못하는 그 애가 알려준 길을 따라 잘 알지 못하는 바다를 정처 없이 찾아온 것처럼, 누군가를 여행하고 싶어졌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워졌고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과거에 만났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짙어지고 새로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깊게 남을 때면, 나는 종종 사람이 무서워지곤 했다. 새로운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과 누군가에게 실망할까봐 두려운 마음의 괴리는 외로움을 낳았고, 그 외로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만남들에 대한 그리움을 낳았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머리칼에 스며들었다. 아, 어쩌면 나는 지금 용기를 내고 있는지도 몰라. 잘 알지 못하는 골목을 기웃거리면서 이름 모를 바다를 걷는 중인 걸. 어쩌면 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래서 이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중일지도 몰라. 그 애의 흔적을 쫓아 온 바다에서 나는, 위로받고 있었다. 그 애가 좋아한다던 바다도, 이곳으로 오는 굽은 초록 산길들도, 그 애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 모든 것에 위로를 받았다. 어쩌면 그 애가 바다에 작은 위로를 숨겨 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애의 바다였던 이곳이 내게도 조금은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다면, 이 바다를 여행한 것을 사람을 여행한 것이라 여겨도 될까. 그 애를 여행한 하루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이 바다를, 외로움의 끝을 알려준 그 애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따뜻한 바다 내음을, 조용하고 담담한 풍경 소리를, 겹겹이 쌓여 더 풍성한 초록빛을, 선물해 주어 고맙다고. 나는 속으로 가만히 인사를 전하고 생각의 마침표를 찍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불고, 나에게도 불어오고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 후에 마음 아픈 사람, 인생이 버겁기만 한 사람, 사랑이 어렵다고만 느낀 사람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기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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