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숙사생의 수능 도시락
어느 기숙사생의 수능 도시락
어느 기숙사생의 수능 도시락
2017.04.10 20:15 by 고수리

기숙사생의 준말 기생. 보통 지방에서 유학 온 친구들이 기생이었다.

여고시절, 나는 ‘기생’이라고 불렸다. 기생들이 머물던 기숙사는 학교 건물 안에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갈 것 없이 그대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면 거기가 기숙사였다. 밤이면 학교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가 기생들은 꼼짝없이 갇혔다. 갇힌 채로 새벽 두세 시까지 자습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서 우리 학교 꼭대기 층은 까만 밤에도 등대처럼 빛났다.

물론 공부만 한 건 아니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할 나이다 보니 야식을 엄청나게 먹었다. 컵라면과 과자는 기본, 줄넘기 여러 개를 엮어 창밖으로 던져서 배달 온 치킨을 매달아 끌어올리기도 했다. 배달원 오빠가 젊고 발랑 까진 경우에는 종종 소주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럼 사감 몰래 옥상에 올라가 그것들을 까먹곤 했다. 내 친구가 그 오빠와 썸을 탔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암튼 우린 기생 나름의 로망을 즐겼다.

고3 교실은 피곤과 냉기가 흘렀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들 때도 있었지만, 수능 D-100에 들어서면서부터 친구들은 부쩍 예민해졌다. 툭하면 짜증내고, 툭하면 울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정말로 툭 건들기만 하면 눈물이 주룩주룩. 아마도 감수성과 예민함의 끝판왕은 바로 고3 교실이 아니었을까. 오르락내리락하는 성적표를 받아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어느 기숙사생의 수능 도시락

시간은 흘러흘러 수능 D-1이 되었다. 대부분 기생들은 예비소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기생 중에서도 궁극의 기생, 전라도에서 반나절은 달려야 갈 수 있는 강원도에서 온 유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모네 집이 가까이 있었지만, 수능 전날이라 마다했다. 낯선 곳에서 자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나와 비슷한 사정으로 남은 친구들이 세 명 남짓. 수능 전날 밤의 기숙사는고요했다. 자습실에는 사이가 서먹한 다른 반 친구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사각사각 샤프 소리만 들렸다. 금방이라도 목에 수건을 두른 기생 친구들이 추리닝 차림으로 ‘누구야아~’ 소리치면서 시끄럽게 달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되게 서글펐다. 수능 전날, 다른 애들은 따뜻한 집에서 엄마가 깎아준 과일을 먹고 있으려나. 나만 차가운 콘크리트 자습실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보고 싶었다. 친구들도 엄마도. 하지만 엄마와는 짧은 통화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엄마, 나 괜찮아. 자신 있어. 잘 보고 올게!” 씩씩하게 말했다.

나는 멜랑콜리한 기분에 휩싸였고, 수능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이 시험을 보려고 내가 12년을 그렇게 죽어라 공부한 건가 싶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별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날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대망의 수능 D-day.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급식소에서 도시락을 받았다. 기숙사에 남은 기생이 너무 적어서인지 편의점에서 사온 것 같은 도시락이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통은 넓적하고 커서 손에 들기가 좀 부끄러웠다. 떡상자 같은 도시락을 들고 수험장으로 향했다. 아. 나는 실전 타입은 아닌가 보다. 1교시 언어영역을 치르는 동안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시험을 치를 당시에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몰랐는데, 옆에서 시험 봤던 친구가 나중에 얘기해줬다. 너 진짜 엄청 떨었다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고. 그렇게 벌벌 떨면서 수리영역까지 무슨 정신으로 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점심시간. 친구들과 모여서 점심을 먹었다. 친구들은 하나 둘 도시락을 꺼냈다. 작고 동그란 색색의 도시락들. 그동안 급식만 먹느라고 몰랐는데, 도시락은 그렇게 생긴 거였다. 동그랗게. 장소와 우리들만 달라졌지, 마치 소풍을 온 것 같았다.

색색의 도시락에는 계란말이, 분홍 소시지, 멸치볶음, 감자조림, 장조림, 김치 같은 반찬들이 옹기종기 담겨 있었다. 보온도시락을 싸온 친구도 있었다. 어렸을 때, 좀 산다는 애들은 보온도시락을 싸오곤 했는데. 어렴풋이 그때 생각이 났다. 친구의 보온도시락 제일 밑에 칸에는 된장국이 있었다. 반찬통을 만져보니 아직 따뜻했다.

나는 친구들의 수능도시락이 부러웠다. 정말 많이 부러웠다. 아침에 엄마들이 손수 싸주신 것들이었다. 내 새끼 시험 잘 보게 해주세요, 마음을 담아서. 체하지 않도록 가장 평범하고 맛있는 집 반찬들을 그대로 담아준 소박한 도시락이었다. 반찬 종류는 비슷했지만, 온기 없는 널빤지 같은 내 도시락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차라리 분식집에서 김밥을 사 올 걸 그랬어. 나는 몇 젓가락 끼적대다가 뚜껑을 덮었다.

영어와 사회탐구 시험을 치르고, 제2외국어는 찍고. 등짝이 뻐근할 때쯤 시험은 끝났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하지만 제대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홀가분한 마음 한편, 무척이나 허무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은 가방을 챙겨들고 수험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가장 늦게까지 남았다가, 수험장을 나서기 전, 쓰레기통에 도시락을 버렸다.

현관을 나오니, 사람들이 커다란 구름처럼 교문 앞에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엄마! 부르며 뛰어가는 친구들, 학교 앞에서 내내 기다렸던 부모님들이 친구들을 안아 주었고,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졌다. 하지만 나는 교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며 걸어가는 와중에도 ‘나 이제 어디로 가지? 이모네 집으로 가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수리야.” 교문 앞에 엄마가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것도 잠시, 눈앞이 흐려지더니 엄청난 눈물이 쏟아졌다. 그대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엄마, 못 와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의젓하게 어른스러운 척을 했어도 나는 결국 애였다. 엄마 품이 이렇게 좋은 것을. 아기처럼 안겨서 정말 행복했다. “수고했어. 장하다, 우리 딸.” 엄마가 등을 쓸어주었다.

품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엄마의 젖가슴이 뭉클, 내 마음도 뭉클. 부끄럽지만 그렇게 안겨서 아주 많이 울었다. 엄마도 울었다. 덩달아 곁에 있던 이모도 눈물을 훔쳤다.

수능 당일, 온다는 확신이 없었던 엄마는, 수능을 하루 앞둔 그날 나에게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다. 내 컨디션에 영향을 줄까 봐 그랬단다. 하지만 기어이 하던 일 제쳐놓고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그 먼 길을 달려와 주었다.

“이노무 기지배,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엄마는 내 등짝을 퍽퍽 때리면서 울었다. 역시 우리 엄마야. 내가 피둥피둥 살이 찐 게 그렇게나 슬펐다고 한다. 이모가 말리지 않았다면 내 등짝은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그날, 엄마는 살찐 딸을 데리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러 갔다.

아마도 우리 엄마의 사랑은 도시락이 아니라 삼겹살이었나 보다.

그날 삼겹살 참 맛있었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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