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라 쓰고 감옥이라 읽었다
도서관이라 쓰고 감옥이라 읽었다
2017.04.25 17:22 by 시골교사

‘나이 들어 이렇게까지 스트레스 받으며 공부해야 하나…’

타지에서의 공부는 나의 ‘바닥’을 보여줬다. 난생 처음 느껴본 열등생의 경험이었다. 학기마다 하나씩 권총을 차고(F학점을 받았다는 뜻), 재시험도 숱하게 치렀다. 부족한 어학실력은 물론이고, 애초에 공부의 수준 자체가 만만치 않았다.

처음 느껴본 낙제의 경험. (사진: docstockmedia/shutterstock.com)

포기하고 싶었던 공부

시험 후에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교수연구실 벽보에 ‘니히트 아우스라이현트(nicht ausreichend‧불합격)’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허무함에 사무쳤다. 40~50점. 한국에선 우스운 점수지만 독일에서의 난 이 점수를 얻기 위해 정말 안간힘을 썼다.

우리 학과의 상당수 학생들은 낙제를 경험했다. 왜 그럴까? 독일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서? 결코 아니다. 학기마다 비싼 등록금을 내는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등록금이 없는 이 나라에선 평가와 점수의 냉혹함과 잔인함이 존재한다. 수준미달이면 가차 없이 낙제. 수준이 없으면 사회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독일의 대졸자들이 대체로 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평가 방식도 과마다 전부 다르다. 인문학과는 학기마다 과목별 시험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방학 때 보고서를 써야 한다. 의과 계열은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칠 때 국가고시를 치르고, 법학과의 졸업시험은 한국의 사법고시와 같은 기능을 한다. 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으로 넘어갈 때, 대학원을 졸업할 때 치르는 졸업시험을 보기 위해 최소 한 학기에서 1년 이상은 시험 준비를 따로 해야 한다.

포기하면 편해…(사진: Ollyy /shutterstock.com)

졸업논문 끝, 이제 자유다.

모든 시험을 마치고, 논문학기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 친구 한명은 지난 학기 논문을 썼다가 떨어졌다고 했고, 어떤 베트남 친구는 초죽음이 될 정도로 고생한 끝에 간신히 통과했다고 한다. 물론 어디나 잘난 친구들은 존재한다. 친한 중국 친구는 제출한 논문이 최고점수를 받아 그 학기 석사 논문상을 받고, 바로 그 교수 밑에 조교로 발탁되었다. 이런 극과 극의 결과 속에서 내 마음은 왜 이리 불안한지…

우리 과의 경우 졸업논문은 또 다른 시험의 형태이다. 정해진 기간 안에 주어진 주제를 다뤄야 한다. 졸업논문은 기간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하나는 2개월짜리, 또 하나는 6개월짜리 논문이다.

두 달짜리 논문 시험의 경우 학생에게 주어진 자유는 없다. 본인이 지도교수를 찾아가 논문을 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 교수가 주제를 정해준다. 주제는 논문을 쓰기 시작한 첫 날에 공개된다. 그러면 그 날부터 정확히 두 달 안에, 정해진 양만큼을 써 내야 한다. 그 양에 넘쳐도 부족해도 안 된다. 주제가 당일 공개되기 때문에 무슨 주제가 나올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6개월짜리 논문은 주제를 본인이 정할 수 있다. 또 언제 시작할 것인지 기간도 학생 스스로 결정한다. 하지만 2개월짜리에 비해 두 배의 양을 써내야 한다. 장·단점이 있지만 난 2개월짜리 논문을 선택했다. 6개월 내내 학교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여긴 감옥입니다. (사진: Jannis Tobias Werner/shutterstock.com)

논문주제를 받는 날 아침 8시, 시험을 관할하는 학과 교무과에 찾아갔다. 이미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긴장된 얼굴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주제가 적힌 다섯 개 종이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그 중 내가 선택한 종이에 쓰인 주제는 ‘독일 환경정책에 대한 경제적 평가’였다.

당시엔 선진국끼리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지구온도 변화 협약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산화탄소양을 줄여가는 방안을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체적인 방침도 있었다. 그 방안들의 실효성을 경제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내 논문 주제였다.

주제를 받은 그 시간부터 두 달짜리 감옥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주간은 참고도서와 관련 논문을 찾아 읽으며, 주제에 대한 감을 잡았다. 그리고 또 한 주간은 목차를 세워 나갔다. 목차를 세운 뒤, 목차의 흐름이 논문 주제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기간 안에 한번 허용된 교수와의 만남을 가졌다. 그 때 교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그때부턴 죽어라 써내려 가면 된다.

도서관 문이 열리는 시간부터 닫히는 시간까지, 먹는 시간을 빼고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 책과 싸워야 했다. 점심 땐 일부러 한국 학생들이 식사하는 시간을 피한다. 행여 시간이라도 뺏길까봐서다. 저녁은 집에서 싸가지고 온 빵이나, 가끔 남편이 싸다주는 도시락으로 대신했다.

제출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의심은 커진다. ‘이게 정말 교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여 지고 있는 걸까’ 걱정은 계속 되었다. 게다가 아침에 잠깐 보고 나온 아이들도 걱정이었다.

두 달간의 고독한 싸움. 잠깐 들르는 남편, 살짝 지나가던 중국 친구 등이 대화 상대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제출일 한 주 앞두고, 독일 친구에게 부분적으로 교정을 받았다. 교정해주는 친구를 잘 만나면 논문 점수가 올라가기도 한다고 한다. 내용을 논리적이면서도 성의 있게 다듬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서로 만나 대화를 하면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단순 교정만 두 친구에게 나누어 부탁한 뒤, 마감일날 수정하여 제출했다.

논문을 제출하고 점수가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최대 두 달. 내 성격을 감안하면,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결국 논문 제출 후 3주 정도 지나 직접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는 친절하게도 내 논문을 보여주면서 꼼꼼히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기다리던 말을 들려줬다.

“최종 점수는 말해줄 수 없지만… 합격은 확실합니다.”

나중에 보니, 성적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래도 이젠 자유다!

지금까지 ‘독일유학 이야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시골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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