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토요일마다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갔다. 자고로 주말의 꿀맛은 이불을 둘둘 말고 늘어지게 자는 늦잠이거늘, 엄마는 아침 댓바람부터 이불을 활짝 젖히는 것이었다. 가기 싫다고 휘휘 내젓는 내 손을 기어이 잡아끌고선 집을 나섰다. 그래서 목욕탕 가는 길은 언제나 졸렸다. 나는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요번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도 그랬다. 엄마는 “딸, 내려왔으니까 목욕부터 해야지.”라며 내 손을 잡아끌고 목욕탕에 갔다. 다 컸어도 똑같다. “졸려 죽겠는데, 엄마는….” 역시나 나는 투덜투덜,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채로 엄마를 따라 나섰다.
천지연 목욕탕. 아직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낡았지만 깨끗한 회색 건물이 서 있었다. 지붕 위로는 폴폴 김이 솟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건물의 얼굴이었다. 오랜 단골이다 보니 카운터 아줌마는 알아서 수건 두 장과 초록색 때수건 한 장을 내밀었다. 엄마와 나란히 서랍에 옷을 벗어 넣고, 달그락거리는 목욕바구니를 들고, 여전히 투덜거리며, 나는 목욕탕 문을 열었
다. 눅눅한 습기가 먼저 뺨에 와 닿았다.
오래된 목욕탕의 풍경. 촤아아, 그리고 왕왕 울리는 소리들, 넘치거나 떨어지거나 흩뿌려지는 물소리와 깔깔 웃는 아줌마들의 수다소리,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탕의 기운, 느린 비처럼 또옥 또옥 떨어지는 천장의 물방울들, 타일 벽마다 스며든 나이든 물때 냄새, 찰바당 찰바당 발바닥에 닿는 물의 감촉, 희뿌연 창문으로 들어온 불투명한 햇살과 그 사이를 부유하는 수증기들. 아직 덜 깬 잠에 온통 뿌옇고 몽롱한 그 풍경은 꿈처럼 따뜻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간단히 씻은 후 탕에 들어갔다. 목욕탕 열쇠 끈을 머리끈 삼아 머리를 돌돌 틀어 올리고, 엄마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발가락부터 저릿한 온기가 퍼지고 뜨거운 물이 찰랑찰랑 밖으로 넘쳐흘렀다. 금세 발그레하니 달아올라 예뻐진 얼굴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목욕 가기 싫다고 투덜대던 나도, 단박에 그 시간이 좋아졌다.
흔들리는 물 아래로 우리의 다리가 아른거렸다. 그걸 빤히 쳐다보던 엄마가 말했다. “엄마 다리에 검버섯 피었어.” 나는 갸우뚱 고갤 기울였다. “어디?”
“여기.”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니, 발목 위쪽에 아주 옅은 점처럼 얼룩이 있었다. 자세히 봐야만 겨우 보일랑 말랑한 흐릿한 얼룩이었다. “에이, 잘 보이지도 않고만.”
“아니야. 다른 곳도 얼룩덜룩해. 이제 더 짙게 필거야.” 엄마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자작나무 같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가만히 얼룩을 바라보는 엄마. 검버섯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엄마는 이렇게 목욕탕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투명한 물이 찰랑였다. 그리고 물 아래 아른거리는 하얀 발에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일렁일렁, 서서히 검은 점이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발가락부터 복사뼈, 정강이, 무릎까지 서서히. 엄마는 자신의 늙은 다리를 상상했다. 그러자 그 모습이 꼭 자작나무 같더라고. 하얀 껍질에 까만 점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자작나무 같더라고 그랬다.
“그때 할머니가 생각났어. 의사가 그랬거든. 할머니, 겉으론 멀쩡해 보이지만 모든 장기가 굳어가고 있었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 할머니 몸에 하나둘 피어나는 검버섯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이건 그냥 얼룩이 아니구나. 울 엄마가 속이 다 굳어가니까 밖으로 피어나는 까만 멍이구나… 할머니 비쩍 마른 몸을 만져주는데, 축 처진 살이며 쪼글쪼글한 주름이며, 손바닥에 느껴지는 게 꼭 자작나무를 만지는 것 같더라. 하얀 몸에 까만 멍이 찍힌 자작나무. 울 엄마는 이렇게 자작나무가 되어 죽어가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 사람들은 자작나무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자작나무가 슬펐어.”
엄마는 검버섯을 보면서 할머니를, 자작나무를, 그리고 늙어서 죽어간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아직 뽀얗고 탱탱한 내 다리를 쳐다보았다. 일렁일렁, 그 옆에 더 하얗고 더 늘어진 엄마의 다리가 보였다. 그제야 엄마의 옅은 검버섯이 짙고도 검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다. 엄마는 늙어가고 있었다.
탕에서 나와 엄마 등을 밀어 주었다. “우리 딸, 힘이 엄청 세졌네. 이제 애 낳아도 되겠다.” 엄마 등을 휘젓는 내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내가 힘이 세진 게 아니라 엄마가 약해진 거야. 언제부턴가 엄마 등을 미는 일이 가뿐해졌고, 그때마다 나는 맘이 시큰해졌다.
내가 쪼그려 앉은 엄마의 키만 했을 때, 한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꼬맹이인 나를 안고 온몸 구석구석 씻겨주던 젊은 엄마가 생각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거와 미래의 우리 모습을 고대로 닮은 모녀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가슴이 봉긋한 여자애를 씻겨주는 힘센 엄마 옆에, 할머니가 된 딸이 할머니가 된 엄마 등을 밀어 주고 있었다. 엄마, 슬퍼하지 마. 우린 같이 늙어갈거야. 목욕탕처럼 모녀가 돈독해지는 장소는 또 없는 것 같다.
한바탕 개운한 목욕을 마치고 집에 갈 시간.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점퍼를 걸쳤는데, 소맷부리 밖으로 삐져나온 내 손바닥이 쭈글쭈글했다.
“엄마, 이거 봐. 나도 주름 생겼어.”
젖은 머리가 꼬불꼬불한 엄마가 웃는다.
나는 한껏 주름이 잡힌 늙은 손으로 엄마의 손을 맞잡고 목욕탕을 나섰다.
우린 동갑내기 친구처럼 손잡고 걸었다.
어느 새 해가 쨍쨍, 아침이 밝아 있었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