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선행학습,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2017.05.17 10:37 by 시골교사

“중학교 때 아이에게 고등학교 과정 선행을 시켜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어려움을 겪어요. 중학교 과정에서 선행학습을 해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갔을 때 다른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거든요.”

아이들 적응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내게 옆에 앉은 선배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글쎄,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책 읽히기’이다. 학교 다니면서 교과서와 전공서적 외에는 별반 읽은 것이 없어 내 아이 만큼은 책을 끼고 살게 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로망이 되었고, 독일에서 아이에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도록 도서관을 열심히 드나드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노력 외에는 아이 키우면서 별반 한 게 없는 나에게, 또한 선행개념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살다온 나에게, ‘선행학습’은 완전히 생소한 단어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2년 반이 지날 무렵이다. 봄 방학이 끝나면 곧 중학생이 되는 큰아이에게 자습서와 읽힐 책들이 필요해서 서점에 들렀다.

서점 안내 팻말을 따라 중·고생 참고서 코너를 찾았다. 이것저것 필요한 책들을 눈여겨보다 참고서 제목에 붙은 공통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통 선행 돌림노래였다. 수학 선행, 영어 선행, 국어 선행… 책이면 책, 자습서면 자습서, 모두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동안 가슴에 무겁게 담아 두었던 ‘선행이’를 막상 접하니 그 강도가 생각보다 세게 느껴지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에게 필요한 책을 사러 갔다가 마음만 시끄러워진 채 돌아섰고, 그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답이 안 나왔다.

(출처: shutterstock.com/patpitchaya)

실상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행이 아니었다. 복습(역행)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내용에 대한 보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느 지점까지 아이들 손을 잡고 뒤로만 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두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이 형국에 말이다.

애초에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었다. 또 이것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독일에 그냥 눌러 앉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독일 엄마들은 한국 엄마에 비해 행복한 게 사실이다. 그들은 자녀들의 선행교육을 놓고 고민할 이유가 없다. 자녀의 학력과 경쟁이 고민대상이 아니다. 유치원부터 아예 선행학습이 존재하지 않는데다, 학교에 가서 학령에 맞게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리 배워 가는 것이 배움의 재미를 빼앗고 학교생활의 부적응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또한 선행을 하면 월반을 해야 하고, 그것이 오히려 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저해한다며 월반 자체를 신중히 여긴다.

순리대로 가는 것. 즉 공부에 재능이 있으면 대학을 목표로 인문계에 진학하고, 공부에 재능이 없으면 일치감치 기술 익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독일 부모들은 생각한다. 재능과 흥미 없는 공부에 매달려 사는 삶이 종국에는 경쟁력을 잃거나,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단편적인, 교육 원론적인 이유 말고도 선행학습이 필요 없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경쟁을 부추기지 않는 교육과 직업 시스템 때문이다. 5학년을 앞두고 이루어지는 인문계와 실업계의 진로 구분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여기서 인문계 진학률과 실업계 진학률이 거의 30 대 70으로 나뉘어져 대학에 들어갈 그룹이 일찌감치 선별된다. 때문에 대학경쟁에 대한 스트레스 요인이 어릴 때부터 확연히 줄어든다.

대학입학 경쟁을 줄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다. 그것은 대학의 평준화이다. 보통 Uni라고 불리는 독일의 6년제 주립종합대학은 100여개가 넘는데, 이들 대학 간에는 순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전공과목에 따라 좋은 아비투어(고등학교졸업시험) 성적을 요구할 뿐이다. 대학의 서열화가 없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피터지게 싸워대는 과정을 아이들이 겪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출처: shutterstock.com/Olga Danylenko)

실업계 진학 학생들은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만큼의 교육을 6년에서 8년간 학교와 직업현장에서 받은 후 사회에 진출한다. 독일 부모들이 자녀들의 이러한 실업계 진학과 교육에 대해 수용할 수 있는 데는 아마도 학력에 따른 인건비의 차이가 적은데다, 학력이 아니라 기술로 인정받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 시스템과 사회적 분위기가 독일이 지금까지도 제조업 분야에서 흔들림 없는 세계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아닌가 싶다.

이런 듀얼시스템 속에서 그들에게 선행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부모들 머리가 아이들의 선행학습으로 아플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 7년간 머리 비우고 살다온 나에게 선행은 감당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주변 엄마들 중에 ‘선행이’를 모르는 사람은 나빼고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정신없이 선행에 집착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온통 ‘선행이 앓이 중’ 이었다. 그 레이스에 뒤늦게 합류한 나는 이미 속도와 거리에서 밀려나 있었고, 별반 정보와 기술 없는 코치가 되어 아이들 손을 잡고 앞뒤로 허둥댈 뿐이었다.

엄마들이 모였다 하면 선행이는 늘 단골 메뉴로 등장했고, 또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불안감은 더해갔다.

“00는 벌써 고등학교 진도를 나간대요. 미분이 뭐예요? 확률과 통계도 다 뗐대요.”

“00는 해리포터를 초등학교 때부터 원서로 읽었대요. 아이고, 벌써 TEPS 시험에 몇 번 도전했나 몰라요.”

선행아! 너는 도대체 뭐니? 너 때문에 대한민국 엄마들 머리가 돌 지경이다.

독일에서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삶에 끼어들어, 자나 깨나 이 단어 앞에 걱정과 한숨이 나올 줄이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선행학습이 사회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독일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했나보다.

“왜 들어오려고 해? 남들은 못나가서 야단인데, 웬만하면 그냥 거기 눌러 앉아!”

(출처: shutterstock.com/Wittayayut)

선행이를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은 반감에 반감이 생겼다. ‘선진국은 아이들에게 지‧정‧의에, 건강까지 챙기며 고르게 성장하도록 노력하는데, 왜 이 나라는 어린 아이들에게 이렇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공부만 강요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다음의 의문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선행이 왜 필요하지? 그렇게 다 앞서가면 그 결과는 무엇이지? 옛날에는 있는 집 자녀들만 티 안내고 했던 것을 모두가 다 달려들어 하면 결과가 바뀌나? 결과는 이미 부모의 경제력으로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가? 사교육비를 벌기위해 뛰어든 보통 엄마들의 삶은? 가정생활이 그래서 행복한가? 들인 돈 때문에 아이들과 부모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어떡하고? 아이들의 자율성은? 하기 싫어도 가야하고, 보내기 싫어도 보내야 하는 이 수동적인 삶은? 그래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선행이 아이들과 미래를 망치고 있구나!’ 라는 한국 부적응자에게 어울리는 생각은 굳어졌고, 경험한 이상과 주어진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이런 복잡한 생각, 정리되지 않는 생각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와 있는 ‘애벌레 탑’이다.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다 짓밟고 짓밟히고. 그 결과가 허무한 것을 모른 채 열심히 올라가는, 딱 그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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