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가 왜곡한 위대한 현자 임호텝
헐리우드가 왜곡한 위대한 현자 임호텝
2017.05.31 15:15 by 곽민수

1999년에 만들어진 헐리우드 영화 <미이라>와 2001년에 개봉한 속편에는 ‘임호텝’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영화의 자막에선 ‘이모텝’이라 칭했던 것 같은데, 실제 그의 이름이 ‘ii-m-Htp’(만족감 속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인 만큼, 일단 이 글에선 ‘임호텝’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이 영화 속 캐릭터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입니다. 물론 실제의 역사와 영화 속 설정은 아주 큰 차이가 있지만요.

청동으로 만들어진 임호텝 상. 기원전 664-525년경 26왕조 시대.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집트 박물관 소장.

영화에서 임호텝은 신왕국 19왕조 세티 1세 시대의 대신관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략 기원전 1290년경의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임호텝은 이보다 훨씬 오래됐죠. 무려 1300여 년 전인 기원전 2650년경 고왕국 3왕조 시대에 활약하던 인물입니다. 영화 속 임호텝이 ‘아낙수나문’이라는 다소 괴상한 이름을 가진 여성과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복수심에 불타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뜬금없습니다. 역사 속의 임호텝은 후대에 신격화되어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의 현자이자, 박학다식한 학자이며, 동시에 고왕국 이집트의 총리였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도 실재했었던 위대한 인물을 시대까지 바꿔가며 탐욕스러운 괴물로 그려내는 헐리우드의 상상력에 대해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영화 <미이라>에서 임호텝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아낙수나문’의 이름은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누이이자 왕비였던 ‘앙케세나멘’(ankh-s-n-imen : 그녀의 생명은 아멘 신으로부터)을 자의적으로 변조해 만든 것입니다.)

영화 <미이라> 속의 임호텝

신화에 따르면 임호텝은 멤피스 지역의 창조주 프타 신과 카레두앙크라는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이었습니다. 때로는 아예 어머니까지 여신으로 바뀌어서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와 같은 신화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332-30년)나 로마 시대(기원전 30-기원후 395년)에 쓰여진 문헌들을 토대로 복원된 것입니다. 아마도 후대에 임호텝이 신격화되면서 덧붙여진 설정들이라 여겨집니다.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자료인 ‘가뭄 석비(The Famine Stela)’에도 임호텝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조세르 시대에 있었던 7년간의 가뭄에 관한 내용인데, 임호텝은 이야기 속에서 주군인 조세르의 명을 받들어 나일강이 더 이상 범람하지 않는 이유를 조사한 뒤, 범람에 관여하는 크눔 신에게 성공적으로 제사를 올려 강을 범람시키는 영웅적 역할을 합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가뭄, 7년, 파라오와 총리 등의 키워드를 들어 성경 속 요셉의 이야기를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구약성서 속의 많은 이야기들의 서사구조가 이집트에서 확인되는 여러 이야기들의 서사와 아주 닮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집트 남부 아스완 인근의 사헬 섬에 세워져 있는 가뭄 석비

임호텝의 역사적 실재를 보여주는 기록에는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세르답에서 발견된 왕의 석상에 새겨진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임호텝은 조세르의 충직하고 유능한 신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무덤 앞에 설치하는 자신의 등신대 상에 신하의 이름을, 그것도 찬사와 함께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조세르와 임호텝의 각별했던 관계를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조세르의 왕위를 계승하는 세켐케트(Sekhemkhet)의 미완성 피라미드 묘역을 구성하던 벽체에 쓰여진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보면, 임호텝은 조세르 사후에도 여전히 파라오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자신의 평생을 함께해왔던 파라오의 계승자를 섬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임호텝은 조세르의 피라미드와 아주 유사한 형태로 설계된 세켐케트의 피라미드 건설에도 기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세켐케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지하구조만 만들어진 채 완성되지 못한 모습으로 남겨졌습니다.

조세르의 석상.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소장.
사카라 고원 위의 계단식 피라미드

하지만 임호텝의 역사성을 물리적으로 잘 확인시켜주는 유적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설계하고 건설과정을 직접 감독했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입니다. 높이가 60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역사상 지어진 피라미드들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입니다. 즉 최초의 피라미드이죠. 뿐만 아니라,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세계 최초의 거대 석조 건축물이기도 합니다. 임호텝은 이전에 상상조차 못했던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그 프로젝트의 진행을 주관했던 시대를 초월한 천재였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그의 걸작은 여전히 저 사카라의 고원지대에서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기념물을 이 땅 위에 남겨 높은 위대한 인물의 무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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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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