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잘렸어요. 바로 내 점수 위에서.”
1점 때문에 내신등급이 한 등급 밑으로 내려갔다는 말이다. 아이 점수 바로 밑에서 등급이 잘렸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고등학교에 오면 아이들이 예민하게 접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이 ‘등급’이다. 1등급은 전체 수강자의 4%까지, 2등급은 11%, 3등급은 23%까지 등등. 아이들은 과목의 등급으로 서로를 평가하고 경쟁관계를 인식한다. 1점을 얻기 위해 필사적이다. 서술형 답을 채점하다 보면 이런 일은 더 자주 발생한다. 평가기준에서 벗어났는데도 선생님 앞에 와서 1점이라도 달라고 거의 울다시피 하는 학생들도 있다. 왜냐면 그 작은 1점이 등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학교생활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
등급제 때문에 학생들만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다. 교사 역시도 등급이 적절하게 분포되도록 문제를 출제하려고 고민에 고민을 한다. 문제를 너무 쉽게 내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문제가 너무 쉬워 고득점 동점자 내지는 만점자가 4% 이상을 초과하면 등급 블랭크가 생겨 1등급이 사라진다. 또 문제가 너무 쉬우면 점수가 90점 이상이라도 3, 4등급이 되기도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도 이런 부질없는 결과를 아이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게 등급제가 주는 폐단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웬만한 중‧소 도시의 수준 있는 고등학교라면 내신 3등급 이내, 즉 23% 정도에 들어야 인(in)서울, 내지는 지방 국립대 정도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상위 등급에 속한 학생들은 이 등급을 유지, 내지는 상승시키기 위해 3년간 피 터지게 싸워대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7, 80%의 절대 다수의 학생들도 이 기간 동안 똑같이 발버둥 치며 이 시기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문제의 시작이 어디서부터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평가가 제대로 공정하게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등급을 조금이라도 높이거나,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 이상을 공부해야 하고, 또 그것은 사교육의 힘을 빌려야 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현실이 제대로 된 교육인지 그것 또한 의문이다. 뒤엉킨 실타래마냥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끊어내야 얽힌 이 문제가 풀릴지 의문이다.
이런 현실 앞에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회의 에너지를 굳이 대학 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쏟으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독일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인문계와 실업계의 진학이 결정된다. 여기서 초등학교 졸업생의 70% 정도가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 30%가량만 대학 진학을 준비한다. 당연히 국가는 절대 다수의 아이들이 진학하는 실업계 학교에 국가의 에너지를 많이 쏟는다.
70%의 학생들이 중학교부터 사회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익혀 일선에서 한 몫을 당당히 감당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제도적으로 돕는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에 맞는 직업이 분화되어 있고, 그 기술력을 살린 직업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고 먹고 살 수 있는 시스템과 국민적 의식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또한 지방의 인재들이 그 지역발전을 위해 남도록 터전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이면 어떨까 싶다. 지역의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학생들이 갖는 인(in)서울에 대한 강한 집착과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속한 지역에 일자리가 있고, 의료, 교육, 문화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다면 굳이 인서울을 꿈꾸겠는가?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지방의 재정자립도를 높여야 하고, 중앙정부가 갖고 있는 재정적 수단을 지방정부에 넘겨주는 선행 작업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끝으로 특목고의 일반고 전환문제를 잠시 고민해 보고 싶다. 특목고 진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는지, 그 많은 공부의 양과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지쳐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 번의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과목당 풀어야 하는 문제지가 몇 권인지, 이해를 넘어 문제와 정답을 달달 외워야 하는 수학공부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런 노력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이젠 그만 외쳐야 한다. 그것은 그때만 통하던 동력원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