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공기
일요일의 공기
일요일의 공기
2017.06.02 18:36 by 고수리

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김치볶음밥이었다. 일요일엔 내가! 김치볶음밥 요리사! 나는 신김치를 달달 볶으며 짜파게티 광고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곤 했다. 가족들은 이불을 둘둘 말고 아직 자고 있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배고픈 일요일 아침. 가족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일. 내가 가족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물이었다.

먼저 일어난 나는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마가린을 녹이고, 신김치와 참치를 달달 볶다가, 찬밥을 넣고 고슬고슬 볶았다. 거기에 약간의 설탕과 MSG를 마법의 가루처럼 솔솔 뿌려 간을 하고, 돌김을 잘게 부수어 뿌려준다. 그리고 그 위에 반숙 계란 프라이 세 개를 꽃잎처럼 올려내면 김치볶음밥 완성!

그렇게 김치볶음밥이 완성되면, 우리는 프라이팬 주위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숟가락을 부딪치며 밥을 먹었다. 뚝딱 프라이팬을 비우고,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이불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쪼르르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그때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오던 상쾌한 바람. 방안에 기울어 쏟아지던 노오란 아침 햇빛. 가벼운 먼지들이 햇살 속에 눈송이처럼 동동 떠다녔고, 나는 그걸 ‘일요일의 공기’라고 불렀다.

크기변환_일요일의 공기

일요일의 공기를 데우는 것들 - 경쾌한 텔레비전 소리, 가족들과 나의 체온으로 딱 적당히 따뜻한 방안의 온기, 고소한 김치볶음밥 냄새. 이것들은 일요일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요일은 평화로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행복은 일요일 아침처럼 짧기에 아름답게 반짝 빛났다.

그날도 일요일이었다. 눈이 내리려는지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렸고, 공기는 내 허리춤 정도에 가라앉아 잔잔하게 머물러 있었다.

나는 고시원에 혼자 있었다. 고3 겨울. 수능을 치르고 마땅히 지낼 곳이 없었던 나는, 잠시 학교 앞 고시원에서 살았다. 평소에는 고시원 친구들과 함께 밥을 사 먹거나 혼자 빵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하지만 일요일의 고시원은 텅텅 비었다. 일요일은 친구들이 각자의 집에 다녀오는 날이었고, 갈 곳이 없던 나만 덩그러니 혼자였다.

수능은 다 끝났고 교과서는 이미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공부할 책도 없었고, 텔레비전도 없던 방은 우주처럼 조용했다. 빌려둔 만화책이나 볼까 했지만 그것도 귀찮았다. 좀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싫어 그냥 방 한가운데 멀뚱히 앉아 있었다. 무념무상.

혼자라는 게 딱히 외롭거나 슬프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꼭 나무토막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몽롱한 꿈속에서 나 홀로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나 문 좀 열어줘.” 리삐꾸였다. 서로가 리삐꾸, 고삐꾸라고 부르는 우리는 베프였다. 베프라 하더라도 일요일에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삐꾸네 온가족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살았다. 그런데 지금 삐꾸가 고시원 문 앞에 와 있었다. 털장갑을 낀 손에는 앙증맞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삐꾸는 겨울 공기를 몰고 방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찬 공기가 돌고, 방안이 상쾌해졌다. 방바닥에 철퍼덕 앉은 녀석은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었다. 핑크색 도시락이 나왔다.

“이게 뭐야?”

“너 김뽂 좋아하자네. 내가 만들어 왔어.”

열어 보니, 도시락 두 칸이 전부 다 김치볶음밥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아. 나는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무뚝뚝한 성격에 감동한 티를 내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냥 도시락 통을 열고 한 숟가락 떠먹어 봤다. 기대로 가득 찬 삐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턱이 뻐근하더니 곧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아삭한 김치가 씹히고, 포슬포슬한 참치가 간질이고, 기름진 밥알이 부드럽게 굴러다니고, 그리고 입 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카레향. 카레향?

“이상해.” “왜? 뭐가 이상해?” “이게 무슨 맛이지?”

삐꾸도 얼른 한 숟가락 떠먹었다. 미간이 살짝 구겨지더니 서서히 코 평수가 넓어졌다. 아니. 녀석은 입을 꾹 다문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밥을 마저 넘긴 삐꾸는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엄청 맛없어!”

“왜 카레 맛이 나?”

“그야, 카레를 넣었으니까.”

“왜?”

“찾아보니까 카레를 넣으면 맛있다더라고. 근데 좀 많이 넣은 거 같지?”

좀 많이 라니. 아주 카레를 들이부었고만. 세상에, 내 생애 이렇게 맛없는 김치볶음밥은 처음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데, 녀석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깔깔깔 웃고 있었다. “먹을 거로 장난치지 마, 임마.”

“장난이라니! 야, 나 엄청 진지해. 난생처음 요리해본 거야. 너 혼자 또 빵
사 먹으면 어떡해? 꼭두새벽부터 만들어왔는데 완전 쫄딱 망했네.”

삐꾸가 웃음을 뚝 그치고 쓸쓸하게 말했다. 하긴 뜀박질 좋아하고, 섬세한 감성이라곤 솜털만큼도 없고, 여성스러움이랑은 아주아주 거리가 먼 녀석이 요리를 잘한다는 게 더 이상하지.

“정말로 그렇게까지 맛이 없는 건가.” 꿍얼대며 몇 번이고 밥을 먹어보는 삐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일요일 아침이면 조금 일찍 일어나 혼자 김치볶음밥을 만들던 내가 떠올랐다. 신김치를 달달 볶던 내 뒷모습은 어느새 삐꾸의 뒷모습으로 바뀌어 있었고, MSG를 넣던 내 모습 위로 카레 가루를 들이붓는 녀석의 모습이 겹쳐졌다. 얘는 또 아침부터 감동을 주고 그래. 코끝이 시큰해 나는 괜히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밥을 먹었다.

“고삐꾸, 억지로 먹지 마.”

“아냐. 먹다 보니 또 먹을 만해. 카레 김뽂이 원래 이런 맛인가 보네.”

“그런가? 하긴 나도 이런 건 한 번도 안 먹어봤어.”

“리삐꾸, 잘 먹겠습니다!”

도시락 두 칸에 꾹꾹 눌러 담은 카레김치볶음밥. 우리는 방바닥에 앉아서 숟가락을 부딪치며 밥을 먹었다. 야무진 숟가락질에 금세 도시락이 텅텅 비었다.

우리는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대자로 누웠다. 방안에 카레향이 은은했다. 햇살을 머금은 공기 중에 노오란 카레가 동동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삐꾸야, 네 미래의 남편을 위해 솔직히 말해줄게. 카레는 넣지 않는 게 좋겠어.”

“사실 나도. 진짜 맛없었어. 꾸역꾸역 먹느라 죽는 줄 알았네.”

우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요란하게 웃었다.

“삐꾸야, 일요일의 공기는 이거야.”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행복했다. 우리는 그대로 곰처럼 누워, 빈 도시락을 치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카레향은 오래도록 방안을 떠다녔다. 우린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수다를 떨다가, 나란히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 삐꾸와 나의 체온으로 딱 적당히 따뜻한 방안의 온기. 일요일의 공기였다.

우린 눈치 채지 못했지만, 창밖에는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은 많은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날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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