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쓰고 그린 <할머니 엄마>
엄마가 되고 나서야 엄마 마음을 조금 알겠다. 고맙고 미안하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고맙기만 했는데 지금은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나는 얼마나 더 엄마로 살아야 나의 엄마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 있을까.
어여들 와서 밥 먹자,
<할머니 엄마>
할머니가 김밥을 말고 있다. 그 옆에는 오렌지 주스와 사이다도 보인다. 달력을 보니 9월 28일, 운동회 날인가 보다. ‘할머니 엄마’라니. 할머니가 엄마 노릇을 하는 듯하다. 할머니도 아이도 고양이도 웃는 아침, 이 날은 어떤 날이 될까.
매일 아침, 엄마 가지 말라고 우는 지은이를 달래느라 할머니는 애를 쓴다. “지은이 눈물에 엄마는 배 타고 회사 가겠네” 정말, 창밖에는 물 위에 둥둥 버스가 떠있다. 어디 지은이 눈물뿐일까. 할머니의 진땀도 흘러가 엄마를 둥둥 밀어 줄 것이다.
할머니는 바쁜 엄마 대신 꽃춤도 추고 줄다리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러 운동회에 간다. 젊었을 적 황소처럼 힘이 세고, 말처럼 빨리 달리고, 엉덩이를 요래요래 춤을 잘 췄던 할머니라서 지은이는 든든하다. 하지만 할머니도 할머니의 두 다리도 늙었다. 느리고 힘이 없다. 열심히 달려보지만 그만 넘어지고 만다. 지은이는 넘어진 할머니를 뒤로 하고 끝까지 이를 악물고 달린다. 저 둘이 달리는 빨간 트랙이 참 서럽다.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시간’ 같아서. 빨간 트랙 위에서처럼 할머니는 쉬지 않고 늙다가 결국, 멈출 것이고 지은이는 혼자서 달려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줄다리기도 달리기도 다 졌다. 지은이의 운동회는 눈물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지은이의 축 처진 마음을 언제 먹어도 맛있는 고로케 두 개가 위로한다. 고등어보다 빠르게 수영할 수 있는 아빠와 지은이만큼 키가 큰 콩나물 얘기까지 더해지니, 다시 웃는다. 할머니가 곁에 있어 다행이다. 지은이게도 지은이의 엄마에게도.
우리는 모두 엄마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에게 ‘엄마’가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엄마를 그린 이 그림책은 다채롭다. 눈물이 났다가 웃음이 났다가 하는데 그 사이에 슬며시 자기만의 엄마가 끼어들어 조금 더 울거나 조금 더 웃게 된다. 나는 할머니가 차려놓은 밥상에 자꾸만 눈이 갔다. 지은이가 아기 새처럼 할머니 앞에서 입을 벌릴 때마다 나의 엄마 생각이 나서 조금 더 울었다.
엄마를 보내고 우는 지은이를 달래려고 할머니는 칼국수를 만든다. 국수 가락 뜨거울까 후후 불어서 주면 지은이는 작은 입으로 호로록 받아먹는다. 운동회 날 아침에는 김밥 한줄 썰어서 심통 부리는 지은이 입에 쏘옥쏘옥,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어르고 달랬을 것이다. 지은이 입맛에 맞추려고 단무지는 많이 당근은 조금 넣었을지도 모르겠다. 운동회가 끝나고 시무룩해졌을 때에는 고로케를 먹인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다. 지은이가 단숨에 고로케 두 개를 먹고 기분 좋게 다시 손 잡아줄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머니는 아빠가 좋아하는 고등어 구이를, 엄마가 좋아하는 콩나물 무침을, 지은이가 좋아하는 달걀 프라이를 생각한다. 그렇게 차린 저녁 밥상 두고 “어여들 와서 밥 먹자”고 들어온 엄마와 아빠를 반긴다. 두 손에는 시원한 보리차를 들고서. 오늘도 지나간다. 자식들 입 속에 넣어줄 밥으로 가득한, 할머니의 하루가.
자식 입에 대해서라면, 나도 좀 안다. 아이가 맛있게 오물거리는 작은 입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과장이 아니다. 입이 짧고 비쩍 마른 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자식의 존재는 원래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먹는 모습이 그리 좋다. 한 팩에 만원 하는 산딸기나 두 송이에 만원 하는 청포도 같은, 비싼 과일도 그 입을 생각하면 서슴없다. 이틀 전에도 청포도가 먹고 싶다는 말에 얼른 사왔다. 좋은 것만 먹이려는 욕심에 친환경 매장에서 국산 청포도를 사왔는데, 씨가 있다고 잘 안 먹으려고 한다. 껍질을 벗기고 알맹이를 4등분해서 일일이 씨를 발라냈더니 그제야 받아먹는다. 가만히 있어도 예쁘지만 잘 먹으니 더 예쁘다. 자식 입 앞에서는 이렇게 열심이다.
엄마와 함께 맛있다고 소문난 냉면집에 간 적이 있다. 냉면 맨 위에 있던 달걀을 엄마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내가 그랬다. “엄마, 그거 초록이 줘요. 초록이가 흰자를 엄청 잘 먹더라고” 내 말을 듣자마자 엄마는 하얗고 매끄러운 흰자를 아이 앞에 그릇으로 옮겼다. 엄마 몫과 내 몫의 달걀 두 개를 초록이는 냠냠 먹었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콩나물에도 미역줄기에도 참기름 대신 식초를 쳐서 무친다. 초록이가 식초의 신맛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맛 나는 콩나물무침이나 미역줄기무침이 좀 어색한데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드신다. 초록이가 잘 먹어 예쁘다, 예쁘다 하면서.
초록이는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 그때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나의 엄마도 삶은 달걀을 좋아한다. 초록이 주라하지 말고 엄마 맛있게 천천히 드세요, 말해야 했다. 늘 이런 식이다. 엄마 입보다 자식 입이 앞선다. 엄마한테 미안하다.
Information
<할머니 엄마> 글·그림: 이지은 | 출판사: 웅진주니어 | 발행: 2016.08.25 | 가격: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