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을 만큼 차가운
죽지 않을 만큼 차가운
2017.07.18 17:36 by 김석준

열한 시 삼십일 분일 초, 이 초, 삼초

콜드플레이의 ‘사이언티스트’를 듣고 있습니다. 지금 시간은 열한시 삼십일 분을 지나고 있습니다.

남자는 정명에 걸린 빨간 글자의 전자 시계를 보며 다시 입을 떼기 시작했다. 남자의 이름은 해경. 라디오 디제이다. 그가 속해 있는 시간은 지금 일 초씩 지금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흐른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흐르면 그의 업무가 끝난다. 해경은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매일 정해진 시간과 장소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WBS 9층 라디오 스튜디오. 디제이란 직업은 정적이고 지루하지만 안정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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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디제이의 본업이라지만, 글쎄, 그는 오 년째 그게 의문이다. 해경의 위로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지만, 글세, 그는 언제나 소통이란 듣기 좋은 포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청취자는 디제이의 목소리를 듣고 글자를 찍어보낸다. 그 중 선택되는 문장 몇 개만이 살아남는다. 버려지는 나머지. 진심이 섞인 문장도 그렇게 오 년째 버려졌겠지. 수년 동안 청취자의 밤을 책임지던 디제이는 항상 그것이 의문이었다. ‘소통은 무슨’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삼십분 밖에 남지 않았네요. ‘송해경의 처음 듣는 라디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다네요.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저를 위해 지금 옆자리에는 옆 방속국 디제이 은지씨가 오셨네요.

옆 방송국 디제이 김은지. WBS 아나운서 출신으로 3년 전 프리 선언을 했다. 지금은 상암동의 다른 방송국에서 2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다. 타 방송국의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은 라디오 업계에서 상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제작진은 둘의 관계를 감안해서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씩 서로 출연해주는 건 청취율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종종 나와서 큰 도움을 주셨던 ‘처음 라디오’의 식구나 마찬가지인 은지씨가 마지막까지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시네요.

에이. 식구는 좀 과하구요. 자리를 빛낸다기보다는 축하하러 왔죠. 매일 라디오 때문에 술 못 마신다고 그렇게 약속을 빼더니. 내일부터는 어림도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니 처음 라디오 가족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저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네요.

그럼 내일 저녁 비워두면 돼요?

제가 내일은 이미 약속이 있어서. 주말에 보는 걸로 하고 어서 사연이나 읽어봐요. 사적인 얘기는 끝나고 하시고.

거짓말이 가득한 라디오 사연들. 해경은 제작진과 프로그램 회의를 할 때, 차라리 사연을 대놓고 지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처음 라디오의 사연 짓는 남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해경의 본업이 소설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짜 사연이면 어때, 메시지만 있으면 그게 더 괜찮지 않아?’ 해경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 사연들이 모두 지어낸 것은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다.

한번은 유로팝댄스형 아이돌 가수인 ‘희열’이 열애설을 인정한 적이 있었는데, 사연 짓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연애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인터뷰한 것이다. 그 아이돌 가수는 ‘거짓말 속에 진실을 숨기면 쉽게 들키지 않으니까요’라고 사연을 보낸 이유를 말했고, 그 말은 최고의 연예랭킹쇼 <케이-나인>에서 그 해 최고의 오그라드는 말에 선정되기도 했다. 덕분에 사연 짓는 남자는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묘한 진흙탕 같은 매력을 지닌 코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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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짓는 남자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미리 밝혀두자면, 오늘 사연은 소설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사실 그 말도 못 믿겠어요. 아무튼 아는 동생인데 꼭 읽어달라고 해서 가지고 왔어요.

해경은 후드티 앞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고 카카오톡 창을 켰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채팅. 피디는 피아노 배경음악을 깔고, 삼 초, 그리고 디제이는 입을 뗀다.

안녕하세요. 저는 평범한 스물 일곱 살 남자입니다. 얼굴을 보나, 키를 보나, 성격을 보나, 평범한 사람이에요. 적당한 깊이와 넓이의 인간 관계를 가졌고 금요일에는 술을 마시고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아, 책을 읽는 건 평범하지 않네요. 아무튼, 제 생각에는 제가 꽤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어쩌면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깨닫는 사건이 있었죠. 지난 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전화를 받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갔죠. 아버지는 담배도 안 태우시고 술도 거의 안 드시고 술 마실 일이 생기면 건강을 생각해서 와인을, 그것도 비싼 와인만 딱 한 잔만 드셨어요. 와인 한 잔은 보약이라면서요. 밥도 보약이라면서 꼭 챙겨 먹었구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런 속설 같은 거 있잖아요. 아침 정보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강에 좋은 속설을 모두 실천하는 사람이었죠. 비과학적인 걸 굉장히 과학적으로 실천하는 분.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니. 저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바로 물었어요. 사인이 뭔가요. 교통사고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러더군요. 불안장애. 불안장애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냐고 물으니 심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고향으로 내려가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는데 눈물이 안 났어요. 괴로우셨겠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슬프지는 않았어요. 그때 들었던 생각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거지’ ‘내가 아이폰 충전기를 챙겨왔나’ 정도. 물론 그 말을 옆에 있던 엄마와 동생에게 하지는 않았죠. 이쯤되니 제가 사연을 왜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눈물이 없는 나 비정상인가요? 그건 아니고, 사실 제 직업은 소설가입니다. 정식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몇편의 책을 출판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설 중에는 메디컬 로맨스도 있고, 법정 로맨스도 있어요. 소설이라는 게 감정이 결여된 사람은 쓰기 힘든 거예요. 소설쓰기도 감정노동이에요. 그런데 감정이 있어야 감정 노동을 하죠. 하지만 저는 남들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짐에도 썩 잘 해오고 있죠. 그 비결은 아마 뛰어난 관찰력 덕분일 거예요. 제입으로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공감능력이 없는 대신 관찰력이 뛰어나요(앗 말해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공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표현하는 법을 타인의 표정과 행동, 말투를 통해 익혔어요. 선천적으로 힘드니 후천적으로 노력을 했죠. 그냥 그렇게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슬픔을 못 느끼는 저를 보며 혹시 병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어요. 병원에 갔죠.

선생님, 제가 슬픔이나 기쁨을 잘 못느끼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동정, 측은지심 이런 게 없어요. 사는데 지장은 없는데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테스크 결과를 보니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있네요. 아… 반사회적 인격장애면 그 소시오패스를 말하는 건가요. 네. 소시오패스면 반지 돌리면서 계획 살인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도 그 드라마 재밌게 봤는데, 그건 드라마 얘기구요. 소시오패스는 그냥 남들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질 뿐이고 범죄자는 아니에요. 잠재적 범죄자도 아니구요. 보통은 성장기에 충격을 받으면 성인이 되어서 이런 장애를 가질 확률이 높아요. 뭐, 이것도 아직 가설이지만 말이에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 뭘 어떻게 해요. 지금 사는데 문제 없죠? 네. 그럼 그냥 사는 거예요. 사실 장애도 아니에요. 조심만 하면 돼요. 아직은 소시오패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으니,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봐요, 환자분도 소시오패스를 범죄자처럼 생각하잖아요. 솔직하게 살겠다고 ‘나, 소시오패스야’라고 밝히면 아마 주변 친구들이 다 떠날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아닌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세요. 잘 어울리면서. 성공한 CEO 중에 소시오패스가 꽤 있어요. 오히려 성공에는 유리할 수 있죠.

뭐, 성공? CEO? 내가 낸 책이 몇권인데 이 의사양반이. 「우리의 저녁은 언제였을까」 「동경일기」이런 거 안 읽어봤나. 아무튼, 송 디제이님. 이야기가 길었는데, 이렇게 제가 사연을 보내는 이유는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 소시오패스는 생각보다 많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어서 여기로 사연을 보냅니다.

사연이 끝나고 배경음악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방송과 어울리는 사연은 아니었다. 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나오면서부터 피디와 작가 그리고 조용히 앉아있던 게스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사연을 다 읽은 해경이 먼저 말했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어떻게 들으셨나요, 은지씨.

뭐… 일단 이 사연을 마지막 방송에 가져오셨다는 게 굉장히 의외고, 이 사연을 송 디제이가 읽은 이유가 있는 거겠죠. 우리 현대인들이 사실 다 정신적으로 아프니까, 소시오패스라는 것도 장애의 하나로 인식을 해야 된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이 분이랑 친하다고 했나요? 이 분은 태어났을 때부터 좀 그랬어요?

좀 그렇다는 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묻는다고 하네요. 처음부터 그랬냐고. 그런 건 아니고 어렸을 때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정확히는 제게 말해주지 않았어요. 제가 더 묻기도 힘들었구요.

제가 너무 솔직한 건지는 몰라도 만약 친구가 ‘사실 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야’라고 고백을 하면 그 다음부터 얼굴보기가 불편할 것 같아요. 신뢰 관계가 흔들릴 것 같아요. 나의 투정을 그 친구가 받아줘도 다 거짓 같고, 웃는 것도 가짜 같고. 모든 감정이 학습된 거라면 계속 의지하며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드네요.

그런가요 역시. 그 이야기를 들으니 좀 슬프네요. 제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친한 동생이라 더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예인들이 많이 겪는 공황장애, 불안장애처럼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역시 따뜻하게 품어지기를 바랬는데, 아직까지는 조금 힘들 것 같네요. 이 방송을 듣고 있을 사연을 보낸 친구에게 아직은 밝히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부모님에게도, 연인에게도.

열한 시 오십구 분 일 초 해경은 준비한 대본의 마지막 문단을 읽는다. 오 년 동안 저의 시간은 밤이 낮이었습니다.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시간이 바로 열 시부터 열두 시였습니다. 처음 읽는 라디오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처음 듣는 라디오뿐만이 아니라 모든 라디오를 사랑해주시고 또 저의 글도 계속 지켜봐주세요. 따뜻한 밤 되세요.

온에어 글자가 꺼지고, 피디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해경씨 그 사람 사연 진짜야? 진짜죠. 그러면 나 좀 컨택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실시간 검색순위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궁금하는데, 반응이 꽤 있어. 모셔봐도 좋을 것 같고. 그리고 이건 웃긴 트윗인데. 해경씨가 소시오패스 아니냐고 하는데. 이 글은 성지글이 될 거라며.

재밌네요. 그 친구한테는 물어볼게요 한 번.

해당 콘텐츠는 김석준 에디터가 출간한 책 <안녕의 안녕>에서 발췌했습니다. 작가와 책에 대해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링크(예스24)를 참고하세요.

 

/사진: Enrique Ramos · Irina Sokolovskaya / shutterst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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