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과 그네와 시소를 모두 타는 삶
미끄럼틀과 그네와 시소를 모두 타는 삶
미끄럼틀과 그네와 시소를 모두 타는 삶
2017.08.16 14:26 by 류승연

20대의 난 ‘지적 유희’를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책과 영화, 음악과 다큐. 그 안에 녹아들어 있는 모든 아프고 작고 어둡고 서러운 것들을 끄집어내 단상 위에 올려놓고 신명나게 떠들어대곤 했다. 치기 어린 젊음이 무기였다.

30대에 들어선 직장생활에 매몰돼 갔다. 결혼을 해선 쌍둥이 출산, 그중 한 놈은 장애아.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이 세상의 작고 아프고 어둡고 서러운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책과 영화는 가볍고 즐거운 것들만 찾았고, 다큐는 ‘동물의 세계’와 ‘우주 대 신비’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내 삶이 바로 다큐다. 눈물과 콧물, 감동과 웃음, 분노와 절망이 모두 있는 생생 리얼 다큐. 내 삶만도 벅찬데 굳이 또 다른 아픔들을 찾아서 그 안에 흡수되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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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SBS 스페셜’에서 방영된 ‘서번트 성호를 부탁해’ 편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다큐는 무려 9년에 걸친 가족들의 일상을 담고 있었다. 장장 9년…. 장애아 가정에 ‘시간’이 미치는 힘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총 2회에 걸쳐 방영된 ‘서번트 성호를 부탁해’ 편 줄거리를 요약하면 간단하다. 주인공인 은성호씨는 자폐증 중에서도 한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는 서번트 증후군을 가졌다.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그를 멋진 음악가로 만들기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전 생애를 전부 바친다. 그러는 동안 성호씨의 동생인 건기씨는 엄마의 손길이 그립다. 가족 안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나지만 결국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가족임을 재확인한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9년이라는 시간 안에 실려 있는 가족들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는 굳이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으리라. 아마 이 방송을 본 많은 장애아 부모들이 크게 다가온 건 동생인 건기씨의 아픔일 게다. 비장애 형제자매만이 갖는 ‘특별한 종류’의 아픔을 고스란히 지닌 건기씨.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홉 살 난 우리 딸.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늘 ‘2인자’ 취급만 했던 딸을 비로소 주인공으로 대하기 시작한 건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올해 들어서부터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늘 잘 되는 건 아니라서 아직도 가끔은 “동생한테 양보해”란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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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을 자기 인생의 주인공, ‘1인자’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는 딸이 점점 자신의 것을 전부 내어주는 아이로 커나가는 걸 보고 나서부터다. 장애아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만 살았더니 어느새 딸은 정당한 자신의 것조차 챙기지 못하는 아이로 자랄 낌새를 보이고 있었다.

놀이터에서의 어느 날. 친구를 만나 신나게 논다 싶었던 딸이 미끄럼틀 아래 가만히 서 있다. “왜 킥보드 안 타?”라고 물으니 친구가 자전거 타야 한다며 자기의 물통을 들고 서 있으라 했단다.

‘아니, 지가 놀겠다고 내 딸을 못 놀게 해?’. 나는 화가 버럭 났는데 딸은 그게 왜 화낼 일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런 날이 계속된다. 하루는 놀이터에서 만난 3학년 언니들과 얼음땡을 하는데 한 언니가 자기 핸드폰을 맡고 있으라며 딸에게 건네자 딸이 가만히 받아든다. 얼음땡을 하다 말고 뒤로 빠져 핸드폰 지킴이 역할을 한다. “싫어. 나도 얼음땡 하고 싶단 말이야. 언니 핸드폰은 언니가 지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것 같다.

내 탓이다. 이 모든 건. 언제나 동생만을 먼저 챙기다 보니 ‘열외’가 되는 상황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이 아이는. 그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걸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내가 그런 환경을 가정에서 제공해 왔던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평소 야무지고 큰 목소리로 똘망똘망 말하는 덕에 첫인상만 보면 얌체일 것 같지만 그 반대다. 얘길 들어보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2인자’ 노릇을 하고 있다. 역할놀이를 할 때도 친구들이 먼저 하고 싶은 역할을 다 차지하고 딸은 남는 걸 맡곤 한다고.

더 속 터지는 일도 발생했다. 언젠가는 몇몇 친구들이 자기들 모임에 끼워 줄 테니 테스트를 통과하라며 딸에게 신데렐라 노릇을 시켰다. 딸은 하루 동안 신데렐라가 되어서 친구들의 신발주머니를 들어주고 심부름을 해주어야 했단다.

그런 일이 연속으로 발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리 부부는 가슴을 쳤다. 대오각성하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 딸이 신데렐라가 된 건 부모인 우리가 딸을 신데렐라 취급하며 키웠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하나 있는 딸이라고 공주 취급하며 키웠다면 부당한 요구에 화라도 벌컥 냈으리라. “니 신발주머니는 니가 들어!”라고. 그런 말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신데렐라로 키워버린 건 온전히 부모 탓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남(동생)을 먼저 생각하고 살게끔 우리 부부가 그리 키워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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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요즘 우리 부부는 틈날 때마다 딸에게 못된 걸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다.

“남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뭐? 바로 내 밥그릇 먼저 챙기는 것!” 아홉 살 난 딸을 앉혀놓고 남들과는 정반대의, 해선 안 될 가정교육을 하고 있다. 내 밥그릇을 먼저 챙기라 한다. 하고 싶은 역할이 있으면 친구들보다 먼저 큰 소리로 역할을 맡으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네가 하고 싶은 걸 한 번 맡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친구들에게 양보해도 된다고 가르친다. 놀이터에서 친구가 또다시 자기 물건을 들고 있으라 하면 “싫어”라며 거절하라고 가르친다. 친구를 놀게 해주지 말고 네가 놀 것을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그런 게 내 밥그릇을 먼저 챙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공주님 왕자님으로 자라난 요즘 아이들 몸에 자연스레 배 있는 자기중심적 습성을 우리 부부는 기를 쓰고 인위적으로 가르친다. 그런 환경을 조성해주지 못했기에. 자신의 것을 챙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기에.

물론 이렇게 부모가 나서서 못된 것을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다.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은 관심을 갖고 대하기만 하면 된다. 평범한 남들처럼 마냥 발랄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로 자라게만 하면 된다. 단지 그러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것이 잘 안 돼서 이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어쨌든 우리 부부는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노력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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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성호를 부탁해’ 2부가 거의 끝나갈 때쯤 딸도 합류해서 함께 시청한다. 밀린 방학 숙제를 벼락치기로 끝내야 했던 탓에 합류가 늦었다.

가만히 TV를 보던 딸이 묻는다. “저 동생은 왜 저런 말을 해?” “저 엄마는 왜 힘들어해?” 나는 장애아인 형을 열심히 돌보느라 엄마도 동생도 많이 힘들었다고 말해준다.

“엄마도 원래는 저렇게 열심히 동환이를 돌봐야 하는데 엄마는 조금 덜 힘들래. 동환이를 조금 덜 열심히 돌보려고 해. 그 대신에 수인이도 돌보고, 아빠도 돌보고 그러려고. 동환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엄마는 그래 보려고 해.”

나는 딸이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는 얘기를 꺼낸다. 마치 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잠시 생각하는가 싶던 딸이 말한다.

“그러니까 놀이터 같은 거네? 놀이터에 그네랑 미끄럼틀, 시소가 있으면 저 엄마는 그네만 열심히 탄 거고 엄마는 그네, 미끄럼틀, 시소를 다 조금씩 타겠다는 거네?”

웃음이 터진다. 뭔가 알아듣긴 한 건가? 그렇다고 말하니 내 목을 꼭 껴안고 말한다.

“엄마, 너무 힘들지 마. 너무 힘들면 TV에 나와서 도와달라고 그래. 아프리카 어린이들 도와달라고 하는 것처럼 엄마도 TV에 나와서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꼭 말해.”

그래. 꼭 그러겠다고 약속을 한다. 딸하고 약속도 했으니 나는 너무 많이 힘들진 않으련다. 한 번 그래 보련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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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장애아 가정의 아픔과 갈등과 실상을 그대로 보여줄 용기를 내어준 성호씨 가족에게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세 분이 용기를 내어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 분 모두. 특히 동생인 건기씨는 더더욱 행복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남은 생은 활짝 웃기만 하며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류승연

필자소개
류승연

저서: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전)아시아투데이 정치부 기자. 쌍둥이 출산 후 180도 인생 역전. 엄마 노릇도 처음이지만 장애아이 엄마 노릇은 더더욱 처음. 갑작스레 속하게 된 장애인 월드. '장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깜놀. 워워~ 물지 않아요. 놀라지 마세요.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생긴 오해는 알면 풀릴 수 있다고 믿는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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