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소방호스가 남긴 희생의 흔적
HOME > > >
버려진 소방호스가 남긴 희생의 흔적
버려진 소방호스가 남긴 희생의 흔적
2016.01.20 03:25 by 한동은

치열한 세상이다. 부대끼며 살다 보면 한 번씩 이런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게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일까…’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이 물음에 응답한 사람들의 스토리다. 누군가는 창업을 했고, 어떤 이는 공방을 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갈 길은 멀다. 제대로 구조를 갖추지 못해 고군분투하기 일쑤다. 그래도 고무적인 건, 이들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는 점이다. ‘언더 스탠드 에비뉴(Under Stand Avenue)’는 이들의 꿈을 응원하는 공간이다. 롯데면세점이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성동구청과 함께 꾸려가는 사회공헌 창조공간으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혁신기업가‧예술가‧비영리기획자 등이 함께한다. 더퍼스트는 이들의 도전이 활짝 꽃피우는 그날을 기대하며 ‘변화를 만나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앞으로도 순탄치 않겠죠. 그래도 나아갈 거예요.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이규동(28) 파이어마커스 대표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고, 내일의 변화를 기대하는 청년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난관에 부딪치기도 하지만, 뜻을 공감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왼쪽부터 이규동 대표, 박용학 씨

‘파이어마커스(Fiermarkers)’는 폐 소방호스를 활용해 업사이클링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종의 소방 패션 브랜드다. 사명 역시 ‘소방의 흔적’이란 뜻을 품고 있다. 지난해엔 그동안 벌어들인 수익 일부를 떼어내 소방관들에게 구조용 특수 장갑을 기부한 것이 알려지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규동 대표는 “갑자기 여러 언론에 보도되며 그 동안 쌓였던 재고를 ‘완판’할 수 있었다”고 멋쩍은 듯 말했다.





파이어마커스의 폐 소방호스를 활용한 업사이클링 제품. 소방호스 무늬와 거뭇한 그을음이 특징이다




한국판 엘비스 엔 크레세의 시작



이규동 대표의 아버지는 소방관이다. 그 역시 한 때 아버지를 따라 소방관을 꿈꿨다. “화재 현장에서 화마와 싸우고 사람들을 구조해내는 소방관이 무척이나 멋졌다”고 한다. 대학도 소방학과로 진학했다. 노량진에서 1년간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갔지만, 어느 날 반전이 일어났다. 대학시절 뒤늦게 들어간 창업동아리에서의 경험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노선이 바뀌었다. 자신만의 미션이 듬뿍 담긴 사업체를 갖고 싶었다. 창업 아이템을 찾던 중 우연히 영국의 한 기업을 접했다. 폐 소방호스를 활용해 가방을 만들고 판매 수익금의 절반으로 소방관을 돕는 ‘엘비스 앤 크레세(Elvis & Kresse)’였다.



“바로 이거다!”



이 대표에게 친숙한 소방이란 주제.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국내 소방관들을 도울 수 있는 기업. 그가 찾는 아이템이었다. 창업동아리 동료인 박용학(28)씨도 공동 창업자로 합류했다. 2014년 4월 한국판 엘비스 앤 크레세는 그렇게 시작됐다. 



파이어 마커스가 수거한 폐 소방호스

 

어렵게 아이템을 확정했지만, 창업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품 디자인에서부터 원단 수급, 판로 개척까지… 실제로 부딪혀 보니 막막한 것 투성이었다. 무엇보다 폐 소방호스를 이용해 가방을 만드는 공정 자체가 쉽지 않았다. 소방호스를 가공하기가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 

 

소방호스 한 줄의 길이는 15m. 보통 한 번에 백 개의 호스를 가공해 공장으로 넘긴다. 화재 현장에서 땅에 끌리고 화마에 그을린 호스를 깨끗이 세척하는 과정이 쉽지 않고, 내피와 외피를 분리해 재단하는 과정도 품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소방호스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이 대표는 “소방관들의 노고와 희생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재가 바로 소방호스”라고 말했다.





소방호스의 그을음은 소방관들의 희생



파이어마커스의 제품은 특별하다. 소방호스마다 각기 다른 무늬와 화재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에 제품 하나하나가 다르다. 이 대표는 “폐 소방호스로 만든 가방의 그을음과 얼룩은 깨끗이 지워야할 때가 아닌, 우리가 감사해야 할 소방관들 희생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의 진심이 통한 걸까. 지난해 9월 제품 판매를 위해 시작한 크라우드펀딩은 목표치 900%이상을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종료됐다. 전체 수익의 20%는 소방관 60여명에게 구조용 특수장갑을 기부하는데 썼다.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 사업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니 좀 더 안정이 된 후 기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아랑곳 않고 진행했다.



“소방관들에게 소방장갑은 필수품이에요. 그런데 제일 먼저 닳고 말죠. 예산 부족으로 제때 새것으로 교체하지도 못하고요.”



어릴 적부터 곁에서 지켜본 아버지 덕에 현업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 대표였다.





이규동 대표(오른쪽)와 그의 부친

 

자신도 한 때 소방관을 꿈꿨었고, 대학 동기들 역시 대다수가 소방관으로 활동 중이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본인이 꿨던 꿈. 이 대표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모든 소방관분들은 제게 아버지이자 친구입니다. 결코 남의 일 같지 않기에 저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전국의 소방관들에게 정기적으로 장갑을 기부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소방관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현재 파이어마커스는 서울 중구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광진구 커먼그라운드에 입점해있는 상태다.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편집숍에도 입점을 조율중이다.



 

올해 초 완공되는 서울 성동구 ‘언더 스탠드 에비뉴’의 오픈스탠드에서도 곧 만나볼 수 있다. 올해 주력 상품으론 폐 소방호스 업사이클링 에코백을 준비 중이다.업사이클링뿐 아니라 소방을 주제로한 다양한 콘텐츠도 계획 중이다. 이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파이어마커스를 통해 소방관에 대한 인식이 바뀌길 바란다.



“파이어마커스의 제품을 통해 많은 분들이 소방관을 그저 ‘고생하는 직업’이 아닌, 시민의 곁에서 시민을 위해 희생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생각해 주길 바랍니다.”(이규동 대표)



파이어마커스 이규동 대표 인터뷰 영상



/사진: 파이어마커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