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항상 들고, 몸은 가볍게. 늙었다고 내려 놓으면 안 돼요." 또랑또랑하게 울리는 목소리, 여든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그네는 "아직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산다" 했다. 곧추 세운 바른 허리에 당당한 걸음걸이, 때때로 신는 하이힐도 문제없다. 우리나라 현직 모델 중 최고령, 지채련 씨의 얘기다. 채련 씨는 2012년부터 3년 째 활동하고 있는 '시니어 모델'이다. 2010년에는 실버미인선발대회에서 '진'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불편한 신발을 신고 런웨이에 서는 일만도 힘에 부칠 법 하지만, 해외무대도 마다치 않는다. 지난 해 10월에는 독일의 무대에 섰고, 올해 6월 27일~7월2일에는 중국 조선족 자치주 초청으로 런웨이에 선다.
ㅣ엄마로, 할머니로만 50년…일흔 살에 새 시작
지채련 씨는 사회적기업 ‘뉴시니어라이프’(www.newseniorlife.co.kr)의 시니어 모델교실에 다니면서 모델 일을 하게 됐다. 모델교실이 열리는 곳은 서울 대치동. 자택이 있는 강원도 원주에서 대중교통으로 꼬박 세 시간 반이 걸린단다. 평소에는 주 1회 강습을 받지만, 요즘처럼 공연을 앞두고는 일주일에 두 번은 상경해 연습한다고 한다.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다니는 걸 보면 건강은 타고난 것 같다”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채련 씨가 원래부터 이렇게 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꿈 많던 20대 초반에 공주 사범대를 중퇴한 게 끝이었어요. 다시 사회에 나온 건 70살이 다 되서라니까."
마흔 세 살에 남편을 잃고, 자녀 세 명에 손녀까지 본인 손으로 다 키워낸 다음에야 자신의 삶을 찾았다. 넘쳐나는 열정은 짬짬이 글을 쓰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2001년 등단 후 계간지 문예지 『농민문학』에 수차례 수필을 실었다. 50년이 지난 후에야 사회 활동을 위해 찾은 곳은 지역 여성회관과 노인복지관이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지"라고 채련 씨는 그때의 소회를 밝힌다. 혼자 된 후 처음 연애도 해 봤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가 아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모델의 길을 열어준 실버미인선발대회의 참여는, 2010년에는 원주노인종합복지관의 추천이 있어 가능했다. 당시 여든한 살이었던 채련 씨는 출전자 중 나이가 가장 많아 ‘장수상’이나 탈 요량으로 나갔다고 했다. 결과는 ‘진’이었다. 채련 씨는 “장기자랑 코너에서 자작시를 낭송한 것이 주효했다” 자평했다. 이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즐거운 일'이 됐다.
ㅣ모든 걸 내려놨을 때, 다시 일으켜 준 런웨이
“늙었다고 해서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그지만 정작 지 씨 자신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던 시기가 있었다. 2년 전 딸을 앞세웠던 때다. 오랜 암 투병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간 딸 이야기를 꺼내며 채련 씨는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 “죽는다고 생각하고 술도 먹고 그랬죠. 매일 매일을 신음하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니 나 같은 노인들이 나와서 패션쇼를 하는 거예요. 실버미인선발대회에 나갔을 때가 생각나면서, 저걸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텔레비전을 통해 뉴시니어라이프에서 활동하는 시니어 모델들의 모습을 접한 것이다. 채련 씨는 바로 전화를 걸어 시니어 모델교실을 신청했다고 한다. 그렇게 삶의 의욕을 되찾아 갈 수 있었다.
ㅣ팔십 평생 다 바쳐 처음 화려했다
“관객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쳐 줬어요. 그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죠.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구나 싶은 게, 팔십 평생 다 바쳐 처음 화려했던 것 같아요.” 채련 씨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독일 순회 공연을 꼽았다. 뉴시니어라이프는 지난해 10월 한독수교 130주년 기념 초청공연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슈발바흐, 베를린 등 4개 도시에서 열었다. 채련 씨도 당당히 여기에 함께 했다. 장시간 비행에 고단했던 건 잠시, 교민과 현지인들의 열렬한 환대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모델로서의 자각도 더욱 강해졌다. 실제로 연습이 끝난 후 지켜 본 평소 걸음걸이에도 모델 워킹이 배어 있었다.
함께 활동하는 회원들은 채련 씨를 “모델 중의 모델”이라며 치켜세웠다. “나이가 제일 많으니 위로 차원에서 그러는 것 아니겠느냐”며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네는 “늙어서 집에만 있으면 안 된다”며 우리네 어르신들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와서 보니 다들 나오면 사람이 달라져요. 스타일도 달라져, 성격도 밝아져, 자세도 교정 돼요. 다른 보약이 필요 없습니다.” 지 씨는 이번 중국 연변 무대를 앞둔 각오를 묻자 “무대에 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오른다”고 답했다. 매 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 그가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온 힘이 여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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