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학원별곡’
독일의 ‘학원별곡’
2016.04.29 17:55 by 시골교사

큰아이는 6살 때 처음으로 ‘사교육’을 받았다. 말이 사교육이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우리가 국‧영‧수 중심이라면, 독일은 주로 예‧체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엄마, 학원 다녀올게요! (사진:Kiselev Andrey Valerevich/shutterstock.com)

큰아이가 다녔던 곳은 ‘주(시)립 예술‧음악학교’. 악기를 배울 요량이었지만, 악기는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저 춤추고 노래하는게 전부. ‘악기를 배우기에 앞서 음악적 감각과 감성을 깨우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이 학교의 규정이다. 그런 교육적 방침과 규정에 따라 아이는 악보 보는 법과 박자 감각을 먼저 익히고, 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고 춤추는데, 무려 2년이라는 시간을 바쳤다.

나 같이 성질 급한 사람에게 그 시간은 그야말로 속 터지는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30분씩, 무려 2년이란 시간 내내 음악에 맞춰 마냥 뛰놀고만 있으니…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공을 들여야 악기를 배울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었다. 한국에선 피아노 2년이면 ‘체르니30번’정도는 치지 않던가.

독일 교육에서 배울 수 있는 건 결국 ‘인내’? (사진:Piti Tangchawalit/shutterstock.com)


| 시립 예술‧음악학교(Volksschule)

앞서 언급했듯이, 독일의 사교육은 주로 예‧체능과 관련된 것들이다. 모든 예‧체능교육은 한 곳으로 통합‧운영되는데, 그곳이 바로 ‘주(시)립 예술‧음악학교’(이하 음악학교)이다. 독일에도 사설학원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주로 방과 후 숙제를 도와주거나, 뒤쳐진 과목에 대해 보충해주는 정도에 그친다. 즉, 학원은 학교 수업을 앞서 가게 하는 게 아니라, 학교성적이 부진하거나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최근엔 독일 교육당국도 학원의 역할에 대해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우후죽순으로 학원을 양성화하지는 않는다.

음악학교의 대상은 6세 이상의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다. 이들에게 악기 뿐 아니라 노래, 미술, 체육활동 등을 가르친다. 거의 종합예술학교 수준. 여기서 다뤄지는 악기만 해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롯, 클래식기타, 키보드, 피리, 나팔, 호른, 클라리넷, 드럼 등이며, 노래도 재즈, 오페라, 뮤지컬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가르친다. 심지어 축구, 댄스, 발레 등의 체육활동은 물론이고 컴퓨터, 수예, 미술교육 등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음악학교 로비 (사진: 시골교사 제공)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을 총괄‧운영하는 곳은 바로 해당 관청인 ‘킬(Kiel) 시청’이다. 시에서는 희망자를 학기별, 내지는 수시로 모집하여 레슨시간을 잡아준다. 음악수업은 음악학교 건물 내 교사 개인 레슨실에서 진행된다. 부모는 이 시간에 아이의 수업을 참관할 수 있다. 모든 레슨이 정해진 시간대에 움직이기 때문에 음악학교 자체가 사람들로 인해 붐비는 일은 거의 없다. 축구, 댄스 및 발레 수업은 학기별로 희망자를 모집하여 운영하되, 주로 학교 운동장과 학교 체육관을 빌려 이루어진다.

음악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는 모두 전공자들이다. 참고로 독일의 대학교(6년 과정)에는 음악, 미술, 체육 등의 예체능 학과가 따로 없다. 있어도 이론위주의 학과가 있을 뿐이고, 실기는 전문음악학교에서 다뤄진다. 이 전문음악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이 주립 예술‧음악학교나 오케스트라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이곳에서 일하는 교사들의 역량은 믿을만 하다.

나 전문음악학교 나온 여자야~(사진:El Nariz/shutterstock.com)

이곳의 레슨비는 레슨시간 분량과 교습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레슨은 주1회가 보통이며, 기초과정의 레슨 시간은 25분이다. 이 시간을 기준으로 레슨비는 그룹의 경우 월 2만원, 개인의 경우 월 3만5천 원 선이다. 레슨시간이 50분으로 늘어나면 레슨비는 배가 된다. 초등학생의 경우 처음에는 그룹 지도를 받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악기에 적응하면 25분짜리 개인교습으로, 그러다가 단계가 높아지면 50분 수업으로 바꾼다.

모든 학원의 기능이 여기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사설 음악학원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예술이 재능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영역이다 보니, 가끔은 실력이 너무 뛰어나 대학교수에게 바로 레슨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도 나타나긴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고액 레슨비 관행은 전혀 없다. 추후 음대생이 되어 교수에게 레슨을 받아도 따로 레슨비를 주지 않는다. 고액 레슨비의 고리가 아예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줄만큼만 주고, 받을 만큼만 받는다.

피아노를 제외한 대부분의 악기는 음악학교에서 빌려 쓸 수 있다. 아이가 악기를 꾸준히 배울지,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렇게 빌려 쓰다가 아이에게 배울 의지가 보이면 그 때 악기를 사준다. 대여료는 악기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플룻과 바이올린의 경우, 한 달 대여료가 1만2000원 정도다.

음악학교에선 주로 일본제 야마하(Yamaha) 악기를 주로 쓴다. (사진:Africa Studio/shutterstock.com)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 음악학교도 방학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방학동안 공부든, 악기든,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방학을 맘껏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방학이라도 학원비는 내야 한다. 억울하지만 어쩌랴, 제도는 제도인 것을.

 

| 동유럽 출신 강사진, 부모 신뢰는 저조한 편

음악학교에서 일하는 사람 중엔 의외로 동유럽 출신들이 많다. 그들은 대부분 모국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면에서는 분명 비교 우위를 갖고 있다. 게다가 상당수가 모국의 불안정한 정치·경제적 사정으로 이곳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어도 독일의 음악 분야에서 만큼은, 동유럽 출신들의 입지가 꽤 공고한 편이다.

큰 아이를 가르쳐준 선생님도 폴란드 출신의 유학파였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 곳 음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이런 좋은 직장을 얻었다는 것은, 실력 면에선 독일 학생들과 겨뤄 확실한 차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 대한 독일 부모의 신뢰도는 결코 높지 않았다. 아마도 독일 부모입장에서는 실력과 별개로 처음 음악을 시작하는 아이를 외국인 교사에게 맡기는 것이 영 꺼림칙했을 것이다. 부모의 우려대로 그녀는 아이들을 다루는 기술이 많이 부족했다. 그녀의 음악 수업은 그다지 정돈되지 않았고, 여기에 아이들의 천방지축까지 더해져 다소 뒤죽박죽인 모습을 보였다.

선생님! 아무리 들이마셔도 소리가 안 나는 뎁쇼! (사진:Jaromir Chalabala/shutterstock.com)

결국 독일 아이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1년이 지나면서 15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반으로 확 줄고 말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독일 부모들처럼 콧대를 세워가며 이것저것 가릴 입장이 아니었다. 자연히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저 2년의 기초과정을 묵묵히 버텨낼 수 밖에. 결국 큰아이는 2년을 꼬박 채우고, 기초반에서 악기반으로 올라가게 됐다.

 

| 여름발표회와 악기 선택

음악학교에서는 매년 학교 강당을 빌려 여름 음악발표회를 연다. 시내 곳곳에 전단지를 붙이고, 초대장도 돌린다. 발표회가 열리면 음악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 아이 악기를 무엇으로 정해야할지 고민하는 부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을 데리고 행사에 참가한다.

프로그램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에는 시‧주 대회에서 우승한 학생들의 다양한 악기 연주가 주를 이룬다. 가끔 해당 연도 전국 음악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한 학생이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렇게 1부 발표회가 끝나면 학부형과 자녀들이 가장 고대하던 2부 시간이 돌아온다. 주최 측에선 강당 안의 10개 정도의 작은 방들을 개방해 놓고, 그 방에서 전공 선생님들과의 면담시간을 갖게 한다. 음악회에 참여한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각 실을 돌며 악기를 만져보고 불어보고 두드려 본 뒤, 전공 선생님들의 조언을 듣는다. 그런 시간을 가진 뒤 배울 악기를 결정한다.

시 주최 음악 대회에서

 

플루트 선생님 게자(Fr.Geja)와 함께 (이하 사진: 시골교사 제공)

큰 아이는 길고 지루했던 2년간의 기초과정을 거친 뒤 플룻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사실 엄마 입장에선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살 수도, 빌려다 놓고 연습시킬 수도 없었다. 그러던 참에 천식이 있는 아이에게 플롯이 좋다는 추천에 따라 플롯을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 음악경연대회

우리 도시에선 매년 1월이면 시에서 주최하는 음악경연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주 대회 참가자격이 주어지고, 거기서 1등을 하면 전국대회로, 다시 그곳에서 1등을 하면 유럽 콩클에 나가게 된다.(시 대회에서 1등을 해도 25점 만점에 23점 이상이어야 주 대회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음악경연 대회는 나이제한이 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출중한 실력을 보여도 11살이 넘지 않으면 주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고, 전국 대회까지 나가려면 13살 이상은 되어야 했다. 음악 수준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가 되어야 더 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취지다. 어린 나이에 천재성이 보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제도적 장치 때문에 대부분의 부모와 학생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린다.

시 대회→전국대회→유럽 콩클 코스를 향해! (사진:Sergey Novikov/shutterstock.com)

하지만 나는 독일 엄마가 아니지 않나. 이곳 엄마들과는 다르게 꽤나 극성스럽게 아이를 연습시켰다. 돈도, 시간도 없는 엄마에게 아이의 음악교육은 부담스러운 투자였기 때문이다. 극성이라고 해봤자 연습시간은 하루에 30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30분 이상 연습을 시키는 것은 극성에 해당한다.

엄마의 극성 덕분인지, 아님 진짜 아이에게 재능이 있었던 것인지, 큰아이는 악기를 배운지 1년 만에 두각을 드러냈고, 레슨 선생님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를 시 대회에 참가시키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말이다. 그런 대회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로서는 선생님의 추천이 황송할 뿐이었다.

큰 아이는 시 대회에 참가하여, 세 번 연속 1등을 차지했다. 그 덕에 킬 지역 신문에 이름이 실리게 되면서 학교와 지역에서도 제법 유명인사가 됐다. 또 음악학교에서 주관하는 발표회는 물론이고, 시 행사나 콘서트에 종종 불려갔고, 시의회 같은 정치모임에 초청되어 오프닝 연주를 하기도 했다. 그런 초청연주 후에는 초등학생에겐 제법 큰 봉투가 쥐어진다. 작게는 2만 5천원에서 많게는 6~7만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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