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둔역, 도시와 시골을 엮다
구둔역, 도시와 시골을 엮다
2016.05.21 16:43 by 최현빈

시골 버스를 타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적은 수의 정류장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도시의 버스와는 달리 이곳의 기사와 승객들은 참으로 느긋해 보입니다. 길가에 사람이 보이면 잠시 멈추어 친근한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구석진 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먼 길을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시골의 버스 노선도에는 같은 정류장의 이름이 많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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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한적한 경기도 양평의 시골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백발이 지긋한 노인들입니다. 올해 나이가 환갑인데도 청년 대우를 받는다는 이 마을 어딘가에서 젊은이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양옆으로 색색의 작은 대문들이 늘어선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작은 역, 구둔역의 광장이 얼굴을 내밉니다. 그곳에서 소리의 주인공들이 사진을 찍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언덕 위의 작은 역

깊은 산 속 간이역

구둔역은 서울과 경주를 오가는 중앙선 열차가 들르던 간이역으로, 1940년에 생겼습니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안동, 강릉 등으로 향하는 열차들이 하루에 네 번 정차해 승객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2006년부터 중앙선 선로를 복선 전철화하는 사업이 진행됐고 2012년 8월,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작은 역사는 역으로서의 임무를 마쳤습니다. 그 역할은 인근에 새롭게 지어진 역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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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끊어진 구둔역 앞 선로

 

과거의 구둔역과 현재의 일신역

선로에 마음을 담아

더 이상 시골의 작은 역에는 열차가 멈추지 않지만 역의 아름다운 경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구둔역을 찾아옵니다. 역사의 보존 상태도 좋아 등록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마을 한 켠에서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무원과 승객이 없어 쓸쓸했을 역에게는 그나마 희소식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이날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족과 연인 단위의 손님들이 구둔역을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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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할 수 있는 구둔역 지붕의 처마

이곳을 찾은 몇몇 사람들에겐 구둔역의 모습이 왠지 익숙합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들이 선로를 걸으며 손목 때리기 내기를 했던 바로 그곳이거든요. 당시에는 역이 운행 중이라 역무원들의 통제 아래에 촬영을 했지만, 선로가 끊긴 지금은 자유롭게 역에서 추억을 담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구둔역에는 유난히 서로의 손을 잡고 선로를 걷는 연인들의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저마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내기도 하고 소원도 빌고, 사진을 함께 찍으며 한적한 간이역에 추억을 남깁니다.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작은 시골역이지만 덕분에 선로도 걸어볼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어서 좋아요.”

신종민(26) 씨는 여자친구, 그리고 다른 커플과 함께 넷이서 양평으로 여행을 나왔습니다.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없는지 인터넷 검색을 하다 이곳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예쁜 사진을 찍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곳이 영화에 나온 그 역이라고 하자 그제야 다들 “거기가 여기였구나!”하고 외칩니다. 신씨는 “역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근처에 특별한 먹거리나 볼거리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으러 나왔습니다.

구둔역 잔혹사

지금은 일신2리로 불리는 이곳의 주민들은 농사가 한창입니다. 윤재성(76) 할아버지는 1967년부터 49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분입니다. 마을의 이장을 지내면서 구둔리 영화체험마을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윤 할아버지는 여전히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젊은 사람들과도 소통하고 싶어 합니다. 이날도 새참 시간에 저희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먼저 말을 걸어주었는데요. 덕분에 구둔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몇 백씩 역 앞 광장에 모여서 쌈박질도 하고 그랬어.”

옛 구둔리가 속해 있는 지평면에는 지평역, 석불역, 구둔역 세 역이 있습니다. 때문에 각각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열차가 소중한 통학 수단이었지요. 때문에 기차 안에서 다른 학교들의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는 날이면 역 앞이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살벌한 분위기였겠지만 할아버지와 간이역에게는 이젠 아득한 추억입니다. 그 시절의 학생들도 대부분 시골을 빠져나가 이젠 마을과 역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신2리의 마을회장 윤재성 할아버지

이곳 사람들이 외지로 가려면 마을 언덕에 자리한 구둔역 대합실을 꼭 거쳐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생기고, 도로도 발달하면서 기차를 이용하는 횟수가 많이 줄었지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여행을 떠날 때도 대부분 열차 대신 관광버스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새롭게 지어진 일신역이 역무원도 없는 무배치간이역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열차는 여전히 소중한 발이 되어줍니다. 산에 살기 때문에 바다를 많이 그리게 된다는 윤 할아버지. 한 해 농사가 끝나면 할머니와 함께 열차를 타고 강릉, 정동진과 같은 동해 바다로 떠난다고 합니다. 산에선 먹지 못하는 회도 먹어 보고, 맑은 바다도 보며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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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열차도 일신역을 지나 정동진까지 가는 기차였습니다.

또한 열차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를 서울 사는 자녀들과 이어주는 소중한 교통수단이기도 합니다. 1년에 대여섯 번은 아들, 딸네를 방문하는데, 복선화가 된 이후로는 청량리까지 52분 만에 갈 수 있기 때문에 한결 편해졌다고 합니다. 때로는 가까운 용문역으로 가서 중앙선과 1호선 전철을 타고 충청도의 온양온천까지 다녀오시는 등 할아버지에게 열차는 발이자 여행 가이드입니다. 조만간에는 어디로 놀러 갈 것이냐고 물어봤다가 할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농사가 그렇게 한가한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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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저 한적한 시골역이지만 예전에는 구둔역 앞에도 식당, 술집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이런 가게들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요. 얼마 전에는 역을 방문한 학생들이 배가 고픈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어 직접 라면을 끓여 주었다는 윤 할아버지. 다 먹은 학생들이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거듭 인사하며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 생각도 많이 났고, 조용한 마을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아 좋았다고 합니다. 이날도 떠나는 저희들에게 할아버지 부부는 젊은이들 힘내라며 응원을 건넸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줄만 알았던 시골의 작은 역 구둔역. 하지만 구둔역은 여전히 농촌과 도시의 사람들을, 어르신들과 젊은 사람들을 이어 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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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둔역 뒤편의 소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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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맘대로 포토 스팟

구둔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처럼 선로를 걷는 사진을 가장 많이 찍습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선로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찍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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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둔역의 전동차 안에서 바깥을 향해 찍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달리는 열차와 나란히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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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J

필자소개
최현빈

파란 하늘과 양지바른 골목을 좋아하는 더퍼스트 ‘에디터 ROBI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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