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댓국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법 feat. 피그말리온
순댓국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법 feat. 피그말리온
순댓국의 본질을 바라보는 방법 feat. 피그말리온
2016.06.21 18:25 by 송나현

며칠 전 이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살만 내려쬐던 그런 날, 친구와 나는 순댓국을 먹겠다며 길거리를 쏘아다녔다. 무대는 종로. 번화하고 번잡한 서울거리가 아닌, 오래됨과 나이듦의 전유물인 종로 거리는 큼직큼직한 빌딩들과 아담하고 오래된 가게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부채를 부치며 길가에 앉아 행인을 바라보는 주인 할아버지와 여러 가지 짐을 옮기며 흥건한 땀내를 풍기는 아저씨들. 그런 그들만의 리그를 순댓국이란 명목으로 침범하는 게 눈치 보였지만, 배고픔의 절정에 오른 나와 친구는 시선 주목을 감수하고 그 작은 골목 사이사이를 헤집었다.

불친절한 좁은 골목과 시야를 가로막는 커다란 철근 덩어리들을 넘어 도착한 순댓국집은 아주 조그마한 가게였다. 메뉴는 단 세 개. 순댓국과 모둠 안주, 그리고 술국.

좁은 식탁과 불편한 의자, 세게 돌아가는 선풍기 틈새를 뚫고 순댓국이 나왔다. 투박한 뚝배기에 투박하게 담긴 모습. 수저 역시 뚝배기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모든 게 불편했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오랜 여정과 기다림이 아깝지 않았다. 뽀얀 국물에 살짝 불은 밥, 고기와 야채로 속을 잔뜩 채운 순대와 그득한 머리 고기.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더운 여름날 우리는 땀을 훔치며 순댓국을 빠르게 흡입했다.

마지막 국물까지 싹쓸이한 나를 보고 친구가 말했다.

"이 순댓국을 호텔에서 먹었어도 이렇게 맛있었을까?"

'뭐, 맛이 어디 가겠어?'라고 대답했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니 친구 말이 맞는듯 싶다. 고생고생해서 찾아온 순댓국집에서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은 순댓국과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고, 정장을 차려입은 웨이터와 고급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먹는 순댓국의 맛이 과연 같을까?

동서양 어디서나 사랑받는 순대

순댓국은 태생부터 '고급'과는 거리가 먼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순댓국이 대중화된 건 조선 시대 후기 무렵. 이때 순댓국은 장터를 중심으로 발달한 음식으로, 시장 상인들과 서민들이 주로 애용했다.(양반들은 거의 먹지 않았다.) 토지나, 객주, 지리산 등 조선 후기 시대상을 다룬 문학작품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먼 길을 향하는 서민들은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순대국을 주문한 뒤 그들의 힘겨운 삶을 자위했다. 

중국에서 순대가 가장 처음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건, 6세기 무렵에 나온 농경서적인 제민요설이다. 그 책에는 '양고기와 양장으로 만든다'고 기술되어 있다. 1039년 북송 때 발간된 사전인 '집운'에는 순댓국을 '돼지 창자에 산초가루와 겨자, 된장, 소금을 넣고 끓인 국'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이때만 해도 손이 많이 가는 고급 음식이었으나 조선 시대 후기 장터나 주막에서 보부상과 농민의 철분, 단백질 보충용으로 쓰이면서 대중적인 음식이 됐다.

우리나라에서만 서민적인 음식으로 통하는 건 아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시장이나 마트에 소시지가 주렁주렁 걸려있는 걸 쉽게 볼 수 있는데, 소시지나 순대나 만드는 방법은 똑같다. 돼지 창자에 여러 가지 소를 넣은 게 순대이고 고기만 채운 게 소시지다.  돼지 창자 요리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서민적 음식이다.

순대를 이용한 음식은 많고 많지만 그 중 으뜸은 순댓국이다. 밥이 들어있어 탄수화물이 보충되고 고기와 순대가 들어있어 단백질까지 얹어주는 든든한 한 끼 식사. 여기에 뜨근한 국물은 술안주로도 손색 없다. 시장이 형성된 곳이라면 항상 순댓국집이 들어서 있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순대국을 고급 식당에서 먹게 되면 우선, 우리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것이다. 입고 가는 옷도 다를 것이며, 재료를 생각하는 마음도 다르고(설령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똑같은 국물이어도 (명인에 의해) 몇 시간 정성들여 우린 국물이라 생각할 게 틀림없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간사하다. 외형과 주변환경이 달라졌다고 똑같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같은 음식을 대할 때 똑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겉모습에 현혹되는 게 아닌, 진정한 맛을 찾을 수 있음에도 말이다.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의 엘리자도 한 그릇의 순댓국에 비유할 수 있겠다.

비 오는 런던의 거리에서 음성학자인 히긴스 교수와 피커링 대령은 구제불능의 사투리와 억양을 가진 꽃 파는 여인 엘리자를 두고 내기를 한다. 히긴스는 자신의 음성학 교습 방식으로 그녀의 발음과 억양을 공작부인의 수준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고, 피커링 대령은 불가능하다고 맞선다. 엘리자는 꽃가게에 취직하려면 자신의 말투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다음날 히긴스를 찾아간다. 그녀는 그의 집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기로 결정하고 그녀의 아버지 알프레드는 딸을 맡기는 대가로 돈을 받아간다.

몇 달 후 히긴스는 엘리자의 변화를 시험해보기 위해 어머니 집을 방문하는데 그때 히긴스 부인의 집에 아인스포드 힐 부인과 자녀들이 손님으로 초대되어 온다. 엘리자는 손님들 앞에서 많이 발전된 억양과 발음을 선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적절치 못한 단어를 사용하여 아인스포드 힐 부인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녀의 아들 프레디는 그런 엘리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또한 딸 클라라는 엘리자의 부적절한 언어 사용이 젊은 상류층의 유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몇 달이 지나고 히긴스와 피커링 대령은 내기의 승패가 걸려 있는 대사관 파티에 엘리자를 데리고 간다. 그 파티에서 엘리자는 사람들에게 헝가리 공주라는 오해를 받음으로써 히긴스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그러나 히긴스의 무자비한 교육방식에 대해 불만에 차 있던 엘리자는 결국 그에게 반항하며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한다. 히긴스는 그녀가 단순히 히긴스의 이론을 증명해주는 도구가 아닌 '여성'임을 인정하고 엘리자는 프레디와 결혼한 후 피컨스 대령과, 히긴스의 도움을 받아 꽃집을 차려 행복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항상 본질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가 길거리에서 꽃 파는 소녀였을 때와, 히긴스(음성학자)교수의 교육으로 고급 드레스를 입고 상류층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그녀는 똑같은 엘리자이고, 똑같은 태생의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자를 천대하던 길거리 소녀가 아닌 헝가리 공주로 착각한다. 그녀의 삶을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외형과 말솜씨가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말이다.

사투리를 심하게 쓰던 소녀와 상류층 언어와 몸가짐을 가진 숙녀는 사람들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물론 처음 보는 입장에선 보이는 것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으로 바꾼 건 히긴스 교수의 무지막지한 교육법이 아니라, 히긴스 교수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숙녀로 대해주는 피커링 대령이었다. 

엘리자 : 그런데 제가 진정한 교육을 시작한 게 뭔지 아세요?

피커링 : 뭔데?

리자 : 제가 윔폴 거리에 처음 온 날 저를 둘리틀 양이라고 불러 주신 거요. 그게 제게는 자기 존중의 시작이었어요…

피커링 : 아, 그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리자 : 아니에요. 그런 행동들은 대령님이 저를 그릇 닦는 하녀보다 나은 존재로 생각하시고 느낀다는 걸 보여 주었어요.

피커링 : 마음 쓰지 마라. 히긴스는 어디서든 부츠를 벗으니까.

리자 : 알아요. 저는 그분을 비난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분의 방식이죠. 하지만 대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던 게 저한테는 커다란 차이를 만들었어요. 숙녀와 꽃 파는 소녀의 차이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접을 받느냐에 달렸죠.

조지 버나드 쇼의 희극에서만이 아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처음 보는 것의 외형에 현혹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본질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나온다. 겉모습에 따라 달리 대하지 않고 섬세한 눈길로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 어디 사람에만 적용되는 말일까.

똑같은 순댓국을 종로 허름한 식당에서 먹든 고급 식당에서 먹든, 맛은 똑같다. 외형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본질을 마주하는 걸 피해서는 안 된다. 외적인 것에 현혹될 것 같다면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자.

'나는 지금 뙤약볕 아래서 굽이굽이 찾아다니던 허름한 식당에 겨우 들어와 순댓국을 한 입 떠먹으려고 한다.'

현혹되려고 할 때, 만사를 똑같이 대하는 데서 우리는 진실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북앤쿡동화 ‘시골 쥐, 도시 쥐’ 속에 나왔던 지하실. 그곳에 한 가득 쌓인 음식은 봉인됐던 나의 ‘식탐’을 깨웠다. 이후 대하소설 ‘토지’를 보고선 콩나물 국밥을 사먹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곤 마들렌을 처음 접했다. 쿡·먹방 시대를 맞아 음식과 문학의 이유 있는 만남을 주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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