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역사, 춘포역
최초의 역사, 춘포역
2016.06.17 20:30 by 최현빈

육백 오십 오, 우리나라 철도역의 수(코레일 기준) 입니다. 수많은 역들이 전국 곳곳에서 자신의 개성을 뽐내고 있는가 하면, 어디에선 역이 사라지고 또 어디선가는 새롭게 역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수많은 역들 중에서 제일 오래된 역은 어디일까요? 철도가 가장 먼저 개통된 서울과 인천 사이? 아닙니다. 최초의 철도역은 저 멀리 전라북도 익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기차역, 춘포역에 다녀왔습니다.

최초의 간이역을 찾아 익산으로 향했습니다.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다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에 위치한 춘포역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역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지어진 것은 1914년. 지금과는 무려 102년이라는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지요. 당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고 4년이 흐른 때였습니다. 때문에 춘포역은 뾰족한 슬레이트 지붕과 같은 당시 일제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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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역들이 그렇듯이 춘포역 역시 일제가 우리의 자원들을 약탈하기 위해 지었습니다. 특히 이곳은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나는 쌀들을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지어진 역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춘포’라는 이름 대신 ‘대장(大場)’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었지요. 호남 지방에서 나는 쌀들이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갔던 만큼, 역 주변에는 부유한 일본인 지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지금도 춘포면에는 당시 일본인이 살았던 일식 가옥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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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된 춘포면 구 일본인 농장 가옥, 지금은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대장역이 춘포역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1996년, 광복 후 51년이 지나서의 일입니다. 춘포(春浦)는 ‘봄개’라는 순우리말을 한자로 바꾼 이름입니다. ‘봄의 개천’이란 뜻으로 수많은 하천들이 이곳 주변을 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 지대인 호남평야에 물을 공급해 주는 만경강과 그 지류들이 이곳을 흐르고 있습니다. 봄개, 정말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저 쌀을 약탈했던 장소에 지나지 않았던 이름을 써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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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면 옆으로 흐르는 만경강의 모습.

대장과 춘포라는 이름 외에도 이곳은 ‘쌀촌’, ‘딸촌’ 등 수많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쌀촌이라는 별명은 이곳에서 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딸촌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그 옛날 대장역은 농촌에서 익산, 전주와 같은 도시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1954년, 지금의 ‘쌍방울’이 익산에서 ‘형제상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했는데, 초등, 중학교만을 졸업한 많은 여학생들이 생계를 위해 이곳 공장으로 출근했다고 합니다. 이때 대장역을 지나는 승객들이 웬 여자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타냐고 해서 딸촌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역사

일제강점기 때는 수탈의 통로로 쓰였고, 광복 이후에는 오가는 학생과 직장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춘포역이지만, 세월이 지나며 쇠퇴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철도가 담당했던 지역 간의 연결을 도로와 버스가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춘포역의 승객들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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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진만이 춘포역의 선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음에도, 승객이 지속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춘포역은 2011년 6월, 결국 폐역이라는 슬픔을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은 한때는 열차가 힘차게 지났던 선로도 완전히 걷혀버린 채 역사만 쓸쓸히 오래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선로가 있던 자리에는 높은 다리가 생겨 그 위로 새롭게 지어진 전라선 철도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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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역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선로는 사라졌지만, 춘포역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자, 일제강점기의 기억과 당시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됐기 때문입니다. 이날도 오래된 역사를 찾아온 어느 아빠와 딸을 만났습니다.

“10년, 20년 정도 된 간이역인 줄 알았는데 100년이 넘었다고 해서 정말 놀랐어요.”

초등학교 5학년인 정은솔 양이 말했습니다. 11살 소녀에게 100년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길이의 시간이었겠지요. 춘포면에 살고 있는 은솔 양은 지역의 문화재를 조사하는 국어 숙제를 하기 위해 아빠 정성식(44)씨와 함께 춘포역을 찾았습니다. 과제를 하면서 이곳의 오랜 역사를 알게 되었다는 은솔 양은 “그러고 보니 지붕이며 기둥 같은 것들이 예전에 일본의 농촌에 갔을 때 봤던 모양과 정말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새롭게 지어진 선로 위로 저 멀리서 열차가 달려옵니다. 기차 소리가 여간 시끄러운지 은솔 양은 두 손으로 귀를 막습니다. 열차 소리가 원래 이렇게 크냐는 딸의 물음에 아빠는 “그동안은 집에서만 들어 왔으니 여기선 당연히 크게 느껴지지 않겠느냐”고 답해줍니다. 15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아빠 정씨는 “처음에는 저녁에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잠이 많이 깼다”면서 “어른들이 왜 기찻길 옆에 살면 자손이 많다 했는지 이해가 되더라”고 말하며 넌지시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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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의 명예 역장

역사 안을 들여다보니 얼마 전에 행사가 열렸던 흔적도 보였고, 방문자들이 남긴 필름 사진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들어가는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부를 관람하고 싶은 사람은 명예역장에게 연락을 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바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싶어 메모에 적힌 연락처로 연락을 하자 저 멀리 두 시간 거리에 있다고 하던 춘포역의 명예역장님이 바로 와주셨습니다.

멀리서 달려오신 최동호 명예역장님.

춘포역의 명예역장으로 있는 최동호(77)씨. 그는 34년간 철도청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공모를 통해 지난 2009년 11월부터 가장 오래된 역의 역장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역에서 손님들에게 역을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멀리서 달려오게 만들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최 역장님은 그런 생각 말라며, 도리어 서울에서 이곳까지 방문해 주어 고맙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때는 버스도 잘 안다니고 기차 하나만 있었어. 통학 때 되면 무슨 개미 떼, 까마귀 떼들이 몰려오고 그랬어. 여기서 엿장수, 물장수들 목소리가 들리던 시절이 아직도 선한데…”

최동호 역장님은 춘포역 옆 동네인 동천동에서 나고 자라 이곳의 옛 모습들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역이 운행을 멈춘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역장님은 역사 앞의 선로까지 걷혀 버린 것이 항상 아쉽습니다. 역장님은 “선로가 남아 있으면 산책로도 만들 수 있고, 꼬마열차도 다닐 수 있고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며 서운한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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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역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 역장님의 모습도 보입니다.

오늘도 역장님은 춘포역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선로도 걷혀 버린 가장 오래된 역사엔 지금도 누군가의 손길이 계속 쌓이고 있습니다. 역 안 곳곳에는 역장님이 춘포역을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비치해 둔 엽서와 책자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역장님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춘포역에도 그 이름만큼이나 따뜻한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전에는 누가 관리를 안 해서 역사에 물도 새고 냄새도 나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풀도 싹 베고 정리가 다 됐지. 사람들이 와서 수고한다고 얘기해주고, 나중에 전화도 해주고 그러는데, 나는 그만큼 좋은 게 또 없지. 이거 역장 모자나 한번 써봐. 모자는 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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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역을 방문할 예정이라면 명예역장님께 미리 연락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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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맘대로 포토 스팟

춘포역이 있는 익산과 김제 주변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지평선을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드넓은 평야 지대 중 한 곳입니다. 푸르른 논과 그 위로 지나는 열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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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J

필자소개
최현빈

파란 하늘과 양지바른 골목을 좋아하는 더퍼스트 ‘에디터 ROBI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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