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절규와 긴 아픔을 품은 거리 ‘Via della Reginella’
짧은 절규와 긴 아픔을 품은 거리 ‘Via della Reginella’
짧은 절규와 긴 아픔을 품은 거리 ‘Via della Reginella’
2016.07.21 17:35 by 김보연

역사 이야기 잠깐 해보자.

유럽에는 ‘게토(ghetto)’라고 불리는 유대인 밀집주거 지역이 있다. 이 중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게토가 바로 로마에 있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과, 카이사르가 만들기 시작해 기원전 1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 당시에 완성된 마르첼로 극장 근처다.

이 구역이 처음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이 된 건 16세기다. 교황 바오로 4세는 테베레 강변부터 시작하는 이 조그만 동네의 사방을 벽으로 막아버렸고, 유대인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20분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한 때는 1만명을 웃도는 유대인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로마의 게토(출처: 위키피디아)

이탈리아가 통일왕국이 되던 19세기에 게토는 해체됐지만, 이 곳에 모여 살던 유대인들 수난의 역사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던 것. 그리고 로마의 유대인들도 이를 피할 순 없었다.

1943년 9월 26일,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나치 친위대장은 유대 공동체 수장들에게 유대인 인질 200명과 금괴 50kg 둘 중에 하나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기한은 하루 반나절. 동정심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선택한 건 금이었다. 금과 목숨 중 택일해야 하는 하루 반나절의 시간.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의 생명줄을 쥐고 있던 이탈리아인들 모두 가시지 않는 갈증으로 그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어렵사리 50kg의 금괴를 구했지만, 끝내 협정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20일 후인 10월 16일, 이탈리아 내에선 최초로 유대인 무차별 체포가 이뤄진다. 그때 끌려간 유태인은 1022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전한 역사 이야기의 무대였던 곳. 특히 당시 끌려갔던 1022명의 아픈 흔적이 남겨져 있는 곳이 바로 오늘 만나볼 ‘Via della Reginella’다.

보통 걸음으로 걸으면 3분이 채 되지 않게 지나칠 수 있는 짧은 골목이다. 판테온 부근의 ‘Torre Argentina’, 폼페이우스 극장 등이 있었던 유적지를 등지고 걸어 들어오면 ‘Piazza Mattei’를 만나게 된다.(이 작은 광장은 우디앨런 감독의 <To rome with love>에서 등장하는 장소이며, 16세기 말에 쟈코모 델라 포르타가 만들고 17세기 베르니니가 한 번 더 손질 한 ‘거북이 분수’도 있다.) 이 Piazza Mattei에서 로마 게토의 중심 거리인 Via del Portico d’Octavia 를 잇는 길이 바로 ‘Via della Reginella’다.

Torre Argentina 전경

 

길 이름 자체에선 명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Regina’라는 여신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저 쌩 하고 지나친다면 다른 골목과 크게 다를 바도 없다. 주황의 건물 벽이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져서 사진 한 장 찍고 싶은 광경이라는 점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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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방이나 미용실 등 상점의 모습들. 다른 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얘기가 다르다. 이 길 바닥 군데군데에는 1022명 중 몇몇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눈물과 피가 흘렀던 자리일 것이다.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공포다. 가족이 함께 발버둥치며 끌려 나갔을 것이다. 성이 같은 이름들이 음각이 되었다. 수천만의 발걸음이 이 동판을 지나쳤을 텐데 이름이 선명하다. 마주치기 두렵지만 계속해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누군가의 눈동자같은 이름들. 그들이 잡혀간 날짜, 죽은 장소와 날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날짜. 그들의 죽음을 마무리하는 한 땀 한 땀의 절규가 맺힌 글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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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이름이 담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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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끝 왼편에는 그날의 비극을 박제한 석판들이 붙어있다.

그렇다. ‘Via del Reginella’는 기억의 길이다. 죽음과 기억, 반성과 변화. 여러 가지 단어가 복잡하게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걷다 보면, 골몰의 끝에서 ‘Via del Portico d’Ottavia’를 만난다.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유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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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a del Portico d’Ottavia’

1천년 동안 이어진 비법으로 빵을 만드는 빵집,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이 해먹던 음식을 파는 식당들, 현재 유대인들의 학교,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인포메이션 센터까지… 비극을 기억하는 힘과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교차하는 장소. 점심이 되자 로마에서 파는 코셔(kosher‧유대 율법, 고기와 유제품을 먹지 않으며 돼지고기를 비롯해 갑각류 해산물을 먹지 않는다) 음식을 먹기 위한 사람들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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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셔 식당과 음식(팔라펠과 이스라엘 식 샐러드)

‘장례식장에서 먹는 자판기 커피’라는 표현을 어디선가 들었다. 울음의 시간에 달짝 쌉싸름함을 넘기고, 결국 툭툭 털고 나의 생으로 가는 끈질김이 삶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하지만 삶의 생명력에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기억하는 힘은 있어야 한다. 물론 Via del Regnella엔 쌉쌀함이란 단어로 표현하기엔 너무 무거운 역사의 핏자욱이 고스란히 남겨져있다.

/사진: 김보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죠'걷고 또 걷는다.' 걸작이라 불리는 도시 ‘로마’를 백 배 만끽하는 비법이다. 한때 전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드나들었던 로마의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 작은 골목길이든, 큰 광장길이든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연이 즐비하다. 로마살이 1년 차 에디터가 전하는 ‘로마의 길’ 이야기를 통해, 콜로세움과 바티칸 너머의 진짜 로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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