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연인
겨울 연인
2016.11.01 15:40 by 오휘명
(사진:Elena Barenbaum/shutter.com)

“아, 여깄다!”

온통 검은 가운데 깨끗하고 하얀빛이 쏟아지는 순간,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많이 흘렀나요. 따뜻하고도 한없이 따뜻하다가, 더워질 때쯤이면 시원해지던, 참 맛있는 잠이었습니다.

마련해주신 곳에서 여덟 달 정도를 편히 자고 나면, 당신은 그 반가운 얼굴로 직접 나를 깨워주곤 했습니다. 네 번째의 겨울 역시도 그 웃는 얼굴과 함께 시작이네요, 이럴 때면 나만큼 축복받은 존재는 흔치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왼쪽 팔 부분은 한 번 뜯어진 적이 있어 약하다는 걸 기억해주시는 건가요, 특히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왼쪽 팔을 다뤄주시네요. 따뜻한 마음.

우리 이번 겨울에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까요. 말만 해요, 어디든 함께 가드릴게요.

*

오늘은 함께 길거리를 걷다, 함께 어묵을 먹었습니다. 당신의 친구와 당신, 그리고 나, 셋이서요. 전에도 종종 함께 먹곤 했지요.

당신은 어쩜 그렇게도 변함이 없이 칠칠치 못한지, 또 어쩜 그렇게도 짓궂은지, 나의 배에 간장 몇 방울을 흘리곤 ‘헤헤’하고 웃었습니다. 나도 그 몇 방울의 얼룩으로 그 입 모양을 따라 해봤는데, 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셨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포장마차의 따뜻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추운 길거리로 나섰을 때, 나는 당신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혹여 당신이 감기를 앓게 되진 않을까 더욱더 정성스레 당신을 품었습니다. 이것 역시 느끼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느끼셨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하루가 참 길었습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우리는 함께 걸었으니까요. 중간에 잠시 들른 카페에서 당신은 조금 피곤했는지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그동안 나의 소매로 그 얼굴을 몇 번쯤 쓰다듬었는데, 몇 해 전 처음 느꼈던 그 뽀송뽀송한 뺨의 느낌이 여전해서, 또 그것 때문에 알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껴서 나는 몰래 주름으로 한참을 울었습니다. 주름 자국이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당신에게 들켜서 창피한 꼴을 보이기 전에요.

무사히 들어온 집, 당신이 나의 곁을 벗어나고 나면 나는 옷걸이의 힘을 빌려 조금 더 어깨를 부풀립니다. 나는 그렇게 방에 구석에 한참을 지키고 서서, 당신이 편안한 밤을 보내길 바라는 겁니다.

*

겨울에 우는 건 처음인가요, 자신의 눈물에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보면요.

나 역시도 ‘겨울의 존재’라, 그래서 예쁘고 밝기만 했던 당신이 우는 건 처음 봤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잠깐만요, 계단은 차가워요, 제 위에 앉아요.

당신이 소리를 내 울지 않기를 원하는 것 같기에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눈물과 콧물이 말라, 그 얼굴이 차가워지는 걸 내가 원치 않기에 소매로 그것들을 닦아냈습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더러워요.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들이 전부인걸요. 함께 걷는 일, 날이 추워지면 꽉 안아주는 일, 당신이 잘 때면 얼굴을 쓰다듬는 일, 당신의 밤을 지키는 일 같은 것들이요.

더 닦아요, 나의 곳곳 역시 조금씩 젖어가는 것 같지만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온전히 당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잘 알잖아요.

*

“내가 옷을 어디에 잘못 뒀었나? 무슨 주름이 이렇게 많이 졌지…….”

짧디짧은 겨울처럼 세월은 점점 빠르게 흐르고, 나 역시 늙어감을 느낍니다. 기분이 좋지 않아요. 어젯밤 당신을 품에서 놓아드릴 땐, 한 번 뜯어졌던 왼쪽 팔이 또다시 뜯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옷이 삭는다’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까요.

그래도 아주 따뜻한 눈빛으로, 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저를 바라봐주셔서 고마워요. 아마 남은 겨울도 우리는 함께일 테죠, 적어도 이번 겨울만큼은 말이에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언젠가 나의 살결과 껍데기가 더 삭게 되면, 더는 옷의 기능을 못 하게 될 겁니다. 과연 그땐 누가 당신을 안아줄까요, 혹 당신이 추위에 떨게 되진 않을까요. 어쩌면 괜한 걱정일까요. 이 세상에 당신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존재가 나뿐일 거라 여기는 건, 어쩌면 조금 건방진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

눈 깜빡할 새에 어느덧 겨울은 다 흐르고 해는 점점 길어져, 나는 봄이 가까워지고 있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 역시 바람이 적게 부는 날이면 저 없이 집 밖을 나서곤 했으니까요. 겨울은 떠나갔고, 이제 당신과 함께 걸을 수는 없게 된 것 같지만, 그래서 슬픈 건 사실이지만, 아, 이토록 정성스럽게 나를 개어둔 자상함이라니요. 나는 이런 이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슬슬 자러 가야겠어요. 다음 겨울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당신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 얼굴을 섬유 깊숙이 담아놓아야겠습니다. 혹시 오늘도 눈물을 흘리진 않겠죠? 혹시 그러신다면 이번에도 소매를 빌려드릴 수도 있는데. 오늘이 아니라면 울지 마셔요. 외롭게 우는 당신의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으니까요.

나는 당신의 오래된 외투, 이번 겨울도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부디 또 만나요, 다음 겨울에.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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