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맘충’이 아닙니다.
우리는 ‘맘충’이 아닙니다.
2017.01.18 15:49 by 지혜

필리스 루트 쓰고, 헬린 옥슨버리 그린 <빅 마마, 세상을 만들다>

커피, 항상 커피가 문제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이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돼?”(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문학동네, 165쪽)

어떤 날 오후, 김지영씨는 유모차를 밀고 공원으로 갔다. 가을 햇볕이 좋았고 할인 행사를 하는 1500원짜리 커피도 맛있었다. 바로 옆 벤치에 커피를 마시는 번듯한 직장인들이 있었다. 부러웠다. 그들은 김지영씨를 흘끔 보았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간간이 들리는 소리,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김지영 씨는 뜨거운 커피가 손등으로 쏟아지는 줄도 모르고 황급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 마음이 얼마나 서럽고 억울했을지 나는, 우리는 안다.

도대체 커피가 뭔데 엄마들이 손에 커피 쥐고 있는 꼴을 못 보는 것일까.

(사진:Uximetc pavel/shutterstock.com)

‘커피’는 맑은 정신과 집중력 그리고 휴식의 상징이다. 게다가 비싸다고 여긴다. 반면 이 시대의 ‘전업맘’은 대략 세 가지 이미지로 소비된다. 능력이 없어서 취직 대신 결혼을 선택한 한심한 여자, 집에서 놀고 먹으면서 남편 등골이나 빼먹는 게으른 여자, 머릿속에 자아는 없고 자식과 남편 그리고 시댁 얘기만으로 가득 찬 멍청한 여자.

그들이 보는 전업맘에게 맑은 정신과 집중력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도 안 했는데 휴식이 필요할 이유도 없다. 돈도 못 벌지 않는가. 전업맘과 커피의 불협화음, 한낮에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엄마들의 모습은 ‘맘충’의 전형이 되었다.

단 한 번도 ‘엄마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너무 쉽게 ‘맘충’을 말한다. 종일 아이를 안고 업느라 부러질 듯 아픈 허리가, 젖꼭지에 피가 맺혀도 모유수유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잠깐의 부재도 용납하지 않고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는 매일이, 바로 우리의 일이다.

그나마 이런 일들은 언젠가 끝이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 있다. 정말 참기 힘든 것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그 위에 튄 반찬국물이었다. 나의 남은 삶을 보는 것 같아서. 배울 만큼 배웠는데 일도 못 하고 그래서 자아도 잃었다는 패배감과 이렇게 계속 구질구질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티셔츠 위로 배어 나왔다. 어쩌면 나도 나를, 맘충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여자가 엄마로 살고 그중에 반은 전업맘이다. 보통의 삶이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집안은 별 탈 없이 돌아간다. 밥을 지어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편안한 방에서 재우는 일로 가족들이 살아갈 배경을 마련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벌레가 되었을까,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패배감과 불안함에 힘들어해야 할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여자와 남자는 똑같다고 했다. 자기의 적성과 희망을 발견하고 목표를 세워 열정을 다해 일하면 모두 성공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것이 삶의 가치라고 했다. 배운 대로 잘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텔레비전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들 중에 오직 엄마로 사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하다. 엄마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도 배우지도 않았으니까. 평등하다면서 여전히 엄마는 제외다.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한다. 남자의 일이었던 ‘바깥일’이 더 중요하다는 뿌리 깊게 박힌 관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서 ‘집안일’은 꾸준히 무시당한다.

직접 마주한 현실에서 여자와 남자는 똑같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내 몸 안에서 아이가 생겼고 자랐고 나왔다. 아이의 주린 배를 채울 젖도 내 몸에서만 나왔다. 자연스레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육아의 무게가 실렸다. 아기를 대신 봐줄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고, 적어도 3년은 엄마와 있어야 좋다고 강조와 강요를 하니 그러기로 했다.

나는 ‘집안일’을 남편은 ‘바깥일’을 맡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나눠서’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전업맘이 되었다. 한심하고 게으르고 멍청한 여자라서가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생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다보니.

 

 

태초에 엄마가 있었다,

<빅 마마, 세상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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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물바다였던 곳에서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낸 이는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다. ‘빅 마마’는 아이의 편안한 잠을 위해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 아이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나무와 열매를 만들고, 아이의 즐거움을 위해 초록풀과 동물들을 만든다. 동시에 빨래와 설거지도 해야 한다. 빨랫감과 접시가 잔뜩 밀려있으니, 남은 세상은 대폭발 딱 한 번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천지를 창조하는 일만큼 살림도 중요하다 여기는 빅 마마가 좋다. 살림이 곧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 말하는 듯하다.

 

SAMSUNG CSC

 

오직 ‘아이가 살아갈 곳’을 만들다가 스스로를 위해 만든 딱 한 가지는 친구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난 외로워. 누가 계단에 앉아 나한테 이야기 좀 해줄래? 우리 아기는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이게 다야 ‘맘마, 찌찌.’ 내 말벗이 될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

풀 죽은 빅 마마의 뒷모습은 나의 것이기도 하다. ‘말 같은 말’이 하고 싶어서 남편의 퇴근만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친구와 나누는 대화 몇 마디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빅 마마는 세상을 하나씩 채울 때마다 기쁨의 탄성을 터뜨린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아주 훌륭해.” 어쩌면 이 시대의 전업맘들을 향한 칭찬일지도 모르겠다. 엄마 손으로 꾸려나가는 집은 작은 세상이고, 그곳에서 먹는 따뜻한 밥 한술이 삶의 기본이자 근거가 되니까.

딸에게 말해 줄 것이다. 너도 엄마처럼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전업맘이 되어도 괜찮다고, 전업맘을 하든 워킹맘을 하든 아니면 ‘맘’을 안 하든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살면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라고.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는 데 힘을 보탤 것이다. 엄마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일 오후에는 동네 엄마들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야겠다. 나는, 우리는 맘충이 아니라 빅 마마 아니던가. 커피를 누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Information

 <빅 마마 세상을 만들다> 글: 필리스 루트 | 그림: 헬렌 옥슨버리 | 역자: 이상희 | 출판사: 비룡소 | 발행: 2004.02.25 | 가격: 10,000원(원제: Big momma makes the world)

 

/사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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