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이름보다 조리법이 더 쉽게 느껴진다. 에콰도르식 렌틸콩 스튜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menestra de lentejas)’ 얘기다. '메네스트라'는 스페인어로 채소와 고기를 뒤섞은 요리를, '렌떼하스'는 렌틸콩을 뜻한다. 조리법은 굉장히 간단하다. 양파, 고추, 토마토 등 손에 잡히는 채소를 기름에 적당히 볶은 뒤 불린 렌틸콩과 물을 넣고 끓여 스튜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커민을 더해 향을 살린다.
에콰도르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는 일하다 만난 동료 강지수 셰프가 알려준 요리다. 강 셰프는 에콰도르 키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그가 말하기를 에콰도르 사람들은 렌틸이 수퍼푸드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 건강 정보를 실어나르는 이런저런 국내외 언론들이 이제 와서 수퍼푸드라 극찬하고 있지만, 거기선 가치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일상과 친숙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흔한 재료로 만드는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는 에콰도르에서 가장 대중적인 요리로 통한다. 남미 주변국에서도 먹고 스페인에서도 즐기는 음식이지만 그래도 에콰도르만하진 않은 것 같다. 구글 검색으로 만난 어느 에콰도르인의 설명에 따르면 에콰도르에서는 어느 식당에 가도 이걸 먹을 수 있다. 특히나 서쪽 해안가에서 많이 먹는다.
에콰도르에선 콩을 많이 먹지만 스파게티조차도 밥과 함께 먹는 문화일 만큼 주식은 쌀이다.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 역시 마찬가지로 밥을 곁들여 먹는다. 그릴에 구운 고기, 튀긴 바나나와 같이 먹기도 한다. 며칠간 먹어봤더니 꼭 밥과 고기를 더하지 않아도 괜찮지 싶다. 콩과 채소만 끓여 먹어도 꽤 든든한 식사가 된다.
렌틸은 단백질 함량이 꽤 높은(25%) 콩이다. 강 셰프는 고기 없이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를 한 달간 먹고 6kg을 감량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음식을 끼고 일하니 어느 순간 몸이 불어난 덕분에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정보였는데, 맛은 나쁘지 않지만 한국사람 식습관으로 이걸 한 달간 먹는 건 좀 어렵다고 느꼈다. 식단 관리는 일주일 만에 끝났지만 그래도 얻은 바가 컸다. 덕분에 불편한 포만감 없이 며칠을 보냈고, 이후 과식으로 몸과 마음이 불편한 날이면 다음날 반성하듯 만들어 먹게 되었다.
이걸 하겠다고 처음으로 렌틸을 샀다. 여기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렌틸은 두 가지 색인데, 하나는 갈색이고 하나는 주황색이다.(갈색 껍질을 벗기면 당근 같은 색깔이 나온다).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는 보통 갈색 렌틸로 만든다. 한편 렌틸은 인도에서도 소비량이 굉장히 많은데, ‘달(dal)’이라 부른다. 그리고 렌틸로 만든 인도식 수프 또한 달이라 부른다. 이건 보통 노란빛을 띤다. 그 밖에도 초록빛이 도는 렌틸도 있다. 이렇듯 색깔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양은 일정한 편이다. 그래서 영어로는 ‘렌즈’로 통한다. 동그랗고 앞뒤로 볼록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렌틸, 아직은 신비로운 식재료
그런 렌틸을 인류는 언제부터 먹었나 찾아보니 까마득한 신석기시대 얘기가 나온다. 약 1만 년 전부터 근동지방(유럽 동남쪽, 즉 아라비아 북동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발칸 등지)에서 재배된 작물이라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렌틸은 성경에 나오는 작물이다(성경은 철기시대에 쓰였다고 전해진다). 무려 창세기에 적혀 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일화에서 나오는데, 창세기 25장에 쓰인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밖에서 사냥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이 지친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이 끓인 붉은색 죽에 이성을 잃는다(29-30.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야곱은 형의 상태를 감지하고 이 수프를 줄 테니 장자권, 즉 첫째 아들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바꾸자 한다(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배고픔을 이길 수 없었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그 붉은 것’을 택한다(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한국어 성경에서 렌틸 수프는 일단 ‘그 붉은 것(Quick, let me have some of that red stew)’으로 번역됐다. 조금 더 읽어보면 ‘그 붉은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팥죽(Then Jacob gave Esau some bread and some lentil stew)’이다. 한국어판 성경은 19세기 후반부터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래서 빵을 떡으로(빵은 18세기 유럽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뒤 식민지 시대에 한국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렌틸 스튜를 팥죽으로 옮긴 것이 이해가 간다. 당시 한국인에게 렌틸이란 식재료는 물론 렌틸 스튜라는 음식 또한 몹시 낯선 개념이었을 것이다. 렌틸은 무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도 약 지난 30년간 아예 존재를 몰랐던 식재료였다.
여전히 조리법이 친숙하지 않은 렌틸을 나는 일하며 만난 외국인 동료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접했다. 파키스탄 카라치 출신 사미나 지브란 씨는 꼭 노란빛 렌틸과 파키스탄산 말린 고추를 고집해 달을 만든다. 인도 북부 루디아나 출신 카잘 샤르마 씨는 렌틸을 하루 이상 불린 뒤 동그랗게 빚어 ‘파코라’라는 이름의 튀김 요리를 만든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렌틸은 채식을 주로 하는 인도인들이 영양을 고루 챙기기 위해 선택한 작물로, 인도에는 렌틸을 활용한 수많은 요리가 있지만 요새 애들은 잘 안 좋아한다고 덧붙인다. 아이들이 콩 가리는 건 어디를 가나 다 똑같은 모양이다.
하여간 존재조차 몰랐던 렌틸이 어느 날 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앞서 적은 것처럼 에콰도르에서 나고 자란 강 셰프가 메네스트라 데 렌떼하스의 조리법과 맛은 물론 효과까지 설명해준 덕분이다. 아직은 팥죽만큼 입에 착착 감기지는 않는다. 이유를 알고는 있다. 내가 만들었으니까 맛없다. 강 셰프가 하면 셰프의 음식답게 맛있다. 좌우간 이제 한 열 그릇쯤 먹었고, 이거 하겠다고 샀던 렌틸 1kg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렌틸을 다 해치울 때쯤이면 붉은 렌틸죽 한 그릇에 귀한 가치를 포기했던 에서의 심정을 나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