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9 14:25 by 오휘명
(사진: shutter.com/augustin Lazaroiu)

나는 언제부터 나로 존재했던 걸까. 기억이라는 건 붙잡았다고 생각되다가도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어서, 과연 내 생生의 시작점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나는 어떤 이유로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를 나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저 걸을 뿐이다.

그렇지만 어렴풋이 어떤 잔향과도 같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건, 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걸어왔고, 수많은 존재가 나에게 스며들거나, 나를 바라봤거나, 내 곁에서 죽어갔거나, 나를 사랑하다가 떠나갔다는 것.

불멸의 생을 산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무릇 어떤 소감이나 느낌을 말하기 위해선, 그 일련의 과정을 ‘다 겪어낸’ 다음에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죽어버린 존재가 입만 살아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어서, 아마 ‘불멸의 생을 살고 난 소감’ 따위는 그 누구도 명료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끝없이 지겨운 과정들을 만나고, 또 그것들을 떠나보낼 뿐이겠지.

오늘은 수많은 날짐승을 만났다. 녀석들은 몇 해쯤 전에 만났던 친구들의 후손으로, 나는 그들 덕분에 오래전의 추억들을 곱씹어볼 수 있었다. 참 잔잔하고 소소했던 나날들이었는데 말이지. 새의 후손들도 그런 나의 반가움을 알아주는 듯, 몇 번이고 나의 품에 안겼다가, 나의 살결을 훑었다가, 신난다는 듯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나는 그들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그리워져서 오래전의 추억들을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해주었다. 몇몇 녀석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그리운 듯 서글프게 울부짖었다. 그래, 살고 죽는다는 건 그런 걸까. 나는 죽어본 적이 없어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벅차오르는 감정과 눈물들을 동반하는 것이 삶과 죽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녀석들은 몇 시간에 걸쳐서 나와 함께하다가, 해가 질 때쯤 무리를 지어 내 곁을 뜨기 시작했다. 누군가 잠을 자러 갈 시간이라고 말했다. 자리 좋은 곳의 나무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살을 비비며 잠을 잘 것이라고.

“살을 비비는 이유는 무엇이지? 그래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숙명 같은 것을 가진 건가?”

무리의 뒷줄에서 분주히 날아가는 새의 엉덩이를 향해 물었다. 녀석은 귀찮다는 듯,

“멍청한 질문을 하시네요.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 살을 비비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요. 밤은 차갑고, 그런 밤을 홀로 나다간 죽어버리게 된다고.”

대답을 듣고 몇 번의 큰 출렁임이 있었다. 멍청하다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깨닫지 못했던 어떤 진리를 깨달은 데에서 온 충격의 표현이었다.

그렇군, 모든 존재는 다른 누군가와 살을 비벼야만 하는구나. 추위에 지지 않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렇지만 나는 수백 수천 년째 죽지 않고 살아있는걸? 나는 누군가와 살을 비비며 잠을 잔 적이 없어.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있고.”

그렇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새의 행렬은 이미 저 멀리 해가 지고 있는 방향으로 제법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새삼스러운 외로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줄곧 혼자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살을 비비지 않아도 죽지 않는 존재였다. 외로워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존재. 다른 누군가가 없어도 되는 존재. 나는 그런 걸 누가 정해두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외로워도 살아갈 수 있다니. 아마 그런 존재는 나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문득 더 외로웠다.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간 이 기분조차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외로웠다.

*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나날이다.

나의 곁으로 그렇게 많은 인간들이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다양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주었다. 그들은 내 몸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예쁨을 받는 기분이 들어, 조금 더 멋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흐르기 위해 애썼다. 몇몇 이들은 나의 그런 흐름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캬-라거나 우와-소리를 내며 감탄하는 목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았다.

인간들은 그 후로도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몇몇 사람들은 나의 눈에도 익어, 나는 반가움과 친숙함을 느끼게 됐다. 태어난 이래 이토록 왁자지껄했던 나날이 있었을까. 나는 ‘한 번도 외롭지 않았던 존재’라도 된 양 활기찬 상태가 되었다. 이런 게 행복일까. 나는 며칠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철새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반드시 이 황홀한 기분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살을 비비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이제야 행복이 뭔지 알겠다고.

나는 한 번도 걸음을 멈춘 적이 없었지만, 만남과 행복이라는 것은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싶게끔 하는 것 같다. 나는 인간들과 한순간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어, 물가에 걸리는 지푸라기로, 물고기의 뻐끔거림과 주저함으로 그들의 그림자에 머무르려 애썼다.

*

인간들은 나의 곁에서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려는 듯 새로운 물건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덩이 같은 것들, 기다란 기둥과 넓은 판때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 당신들이 즐겁다면 나는 뭐라도 좋아. 마음대로 놀다 가. 나는 그렇게 속삭였고, 그들은 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것들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이 부분부터 둑을 쌓으면 되는 겁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부터 육지가 되는 거겠군요.”

오늘 한 인간이 그렇게 말했고, 이내 그의 지시에 따라 다른 인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나의 살결 위에 기다란 기둥들을 박고 돌덩이와 판때기들로 나의 한 부분에 벽을 쌓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동시에 나의 생명력이 얕아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조만간 죽음을 맞겠군.

함께임을 깨닫는 건 과연 그런 거였구나. 어떤 존재가 함께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행복감과 외로움의 흔적은 이런 방식으로 죽음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언젠가 새 한 마리가 내게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 살을 비비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그렇지 않고선 차가운 밤을 홀로 나다가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고.

저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추위와 같은 것들 아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추위에도 죽어버릴 만큼 미약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저들은 내게 벽을 쌓고 난 후에는 영영 이곳을 떠나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영영 추운 밤이 찾아오겠지. 죽음은 그렇게 내게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담이 높아지고 나의 흐름이 완전히 끊기고 나면, 나는 태양과 바람의 일에 의해 마르고 닳아버리겠지.

살고 죽는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인지,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이제야 알게 되었다. 죽고 난 후의 나는 ‘나의 삶은 참 서글프고 행복했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역시 죽은 입으로는 어떤 말도 못 하게 될까.

철새와 물고기와 인간의 기억들이 나의 깊은 곳으로부터 떠오른다, 그리움일까.

부모를 그리워하던 철새의 후손들처럼, 어떤 누군가도 내가 떠난 이곳에 찾아와 울어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흔적만큼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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