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과 상처
가죽과 상처
2017.02.10 17:35 by 청민

“언니, 가죽의 상처는 상처가 아니에요.”

후배 Y가 말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가죽 공방에서 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아무래도 거기에 푹 빠진 듯 했다. 그녀의 가방에선 직접 만들었다는 지갑과 카드 케이스, 그리고 이번에 제작 중이라는 파란색 가방이 나왔다. Y는 지금껏 자신이 만든 공예품을 테이블에 쭉 올려놓고서 만드는 방법을 신나게 설명했다. 여기 라운딩은 이렇게 처리하고 저건 구멍을 뚫어 잘라야 하고요, 하면서.

“근데 가죽 공예가 왜 그렇게 좋아? 다른 것도 많잖아.” 한참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유리나 플라스틱에 상처가 나면 와장창 부서져버리잖아요. 근데 가죽은 하나의 멋이 된다는 게 좋았어요. 가죽의 상처는 지나온 기억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상처가 기억이 된다라, 그건 어떤 의미일까. 상처는 흉터가 아니라 기억이라는 Y의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Y는 자기가 만든 공예품에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가 생긴 순간이 떠오른다 했다.

내겐 상처가 참 많다. 오래된 친구들은 내 상처에 ‘또’라는 단어를 붙여 말하곤 했다. 너 팔꿈치는 또 왜 그래, 무릎은 또 언제 다쳤어. 하도 다쳐서 이제는 호들갑도 떨어주지 않는다. 그건 좀 덜 친한 사람들의 행동이라면서. 얼마 전엔 경주에 놀러갔다가 진드기에 물려 크게 상처가 생겼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물린 자리가 눈에 띄어 차라리 바지를 입을까 고민을 한 적도 있었다. 몸에 크고 작은 흉터가 생길 때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흉터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옅어졌지만, 상처가 지나간 자리들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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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마음에 남은 상처가 있는데, 바로 습진이다. 갑작스레 나타나 나를 덮쳤던, 그래서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습진 말이다. 습진은 열여덟 가을에 찾아왔다. 짧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계절,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그 시절 나는 아빠의 직장 때문에 갑작스레 전학을 갔다. 전학 가는 과정에서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새롭게 만난 아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야자를 끝내고 돌아오던 매일 밤,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됐다.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흠 잡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눈치를 봐야 했던 스트레스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약해졌고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했다. 습진은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슬그머니 나를 덮쳤다.

미친 듯이 간지러웠다. 습진이 피어오른 자리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럼증을 동반했다. 피부는 오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처럼 거칠어졌고, 움직일 때마다 칼로 에는 것 같았다. 통증이 지나간 자리는 검게 착색이 되었다. 처음엔 엄지손톱 크기의 가벼웠던 상처들이 나중엔 사람 머리보다 큰 크기로 피부를 점령했다. 피부에 늘어나는 습진의 자국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흉터를 보고 이상하다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여름이면 습진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꼬치꼬치 묻는 사람들 때문에 머리를 높게 묶을 수 없었고, 팔꿈치 위로 올라가는 반팔을 입을 수도 없었다. 한번은 옷이 몸에 닿기만 해도 너무 아팠다. 임시방편으로 알로에를 얇게 잘라 랩으로 꽁꽁 두르고 수업을 가려는데, 기숙사 계단에서 그게 쑥 빠졌다. 끈적이는 알로에가 바닥을 미끄덩거리며 돌아다녔다. 모든 시선들이 내게 꽂히는 것만 같았다. 당장 습진의 통증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의 시선은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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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마다 나는 문신을 하고 싶다고, 아니 꼭 할 거라고, 몸의 상처를 이유로 들먹였다. 거대한 습진의 상처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또래 속에서 소외당했던 것 같은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덮어버리고만 싶었다. 습진의 상처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더 깊은 흉터를 남겼다. 오랜 시간 나는 그때를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고 살아왔다. 그런데 나의 지난 기억들을 전혀 모르는 Y가, 내 피부 가죽에 새겨진 수많은 시간들을 감히 알 수도 없는 Y가, 내 과거의 기억을 뚫고 들어오며 말했다.

“가죽의 상처는 상처가 아니에요. 거기엔 지난 흔적과 마음들이 담겨 있으니까요. 예전엔 이 상처들이 싫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깊은 매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가죽의 모든 상처엔 지나온 자신의 발걸음과 마음들이 숨어 있단다. 그 시절의 자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기가 있을 수 있다는 Y의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지난날의 감정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겉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갈색빛 교복을 입은 열여덟의 지난 나를 떠올렸다. 사실 오늘도 팔꿈치의 착색이 신경 쓰여 무리하게 긴팔을 입고 나왔는데. 이토록 사소한 한마디에 위로를 받을 줄이야. Y의 말을 듣다가, 괜히 나도 모르게 팔꿈치를 슬쩍슬쩍 쓰다듬었다.

Y의 말에 따르면 내 피부에 새겨진 흔적들도 흉터만은 아닐 것이다. 여렸던 지난날의 눈물과 시간들이 흉터에 담겨 있지만, 그것은 이미 흉터가 아니라 기억으로 깊어지고 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의 상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Y의 말로 인해 죽은 피부 껍질처럼 여겼던 어설픈 지난날들이 다른 의미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을 들여다보듯 지난날의 기억을 다시금 되짚어본다. 어쩌면 상처받았던 내가 있었기에 조금은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걸까. 흉터는 점점 더 많은 기억으로 덮일 테니까.

가죽 공예를 배우자고 신나게 떠드는 Y를 보면서 생각했다. ‘너는 모를 거야. 네가 나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주었는지.’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사랑이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도 여전히 사랑이 불고, 나에게도 불어오고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다. 이별 후에 마음 아픈 사람, 인생이 버겁기만 한 사람, 사랑이 어렵다고만 느낀 사람에게 한줄기 위안이 되기를.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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