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책 읽기 좋은 시간
마음껏 책 읽기 좋은 시간
2017.02.16 11:51 by 지혜

존 윈치 쓰고 그린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책 읽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취미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기에, 이리저리 몰입의 대상을 모색해 보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다. 호기롭게 구입했지만 그저 비싼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버린 우쿨렐레를 마지막으로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별다른 재주도 없고 게으르고 변덕 심한 나를 받아 줄 취미는 오직 책 읽기뿐이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취미를 위해 우리 집에서 제일 좋은 자리,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책상을 두었다.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책, 읽고 있는 책, 읽다가 만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다. 좀 지저분하지만, 독서가의 자리는 본디 그런 법이니 그냥 두기로 한다. 여기에 최근에 구입한 매끈한 플로어 스탠드까지 분위기를 더해 볼 때마다 뿌듯하고 흐뭇하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 나는, 엄마가 아니라 나, 근사한 풍경이 된다.

책 읽을 때는 엄마가 아니라 나다.(사진:patpitchaya/shutterstock.com)

하지만 아주 가끔이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다. 책 좀 읽으려고 하면 세상 모든 일이 자꾸 끼어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읽고 싶다”는 입버릇을 달고 산지 십 년인데, 나의 매일은 ‘아무것’으로 채워진다. 지금, 2월은 유난히 더 그런다. 바쁜 설날도 끝났고, 시어머니 생신도 지났고, 자 이제 책 좀 읽어볼까 했더니 미루기만 했던 보험 가입이 생각났다. 보험료 인상이 코앞이었다. 부랴부랴 보장 내용을 비교하고 약관을 정독하고 계약을 검토하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가입을 마친 날, 자 이제 책 좀 읽어볼까 했더니 볕이 워낙 좋다. 게다가 미세 먼지 수치도 낮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날씨 아닌가. 앞뒤 문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해서 널었다. 자 이제 책 좀 읽어볼까 했더니 커피가 똑 떨어졌다.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려면 어차피 봐야 할 시장이었다.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니 이런, 아이의 하원 시간이다.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 표정이 심상치 않다. 누런 코를 훌쩍거리고 이마는 따끈했다. 그 후로 나흘째 아이도, 아이의 감기도, 내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종일 집 안에서 ‘엄마’를 찾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니 솔직히 조금 지친다. 책 한 장 못 읽고 지나가는 날이 금세 불어났다. 시간을 헛되게 쓴 것 같아 속상하다.

별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발목이 잡히면, 물먹은 솜처럼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진다. 가벼워지고 싶어서, 진한 커피 한 잔 들고 아끼는 그림책 한 권과 마주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할머니를 좋아했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다. 책 읽기라는 유일한 취미(왠지 할머니도 손재주가 없으신 듯하다) 책을 책꽂이에 정리하지 못하고 (아마도 일부러) 쌓아두는 습관, (약간의) 쓸쓸함을 즐기는 태도가 반갑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괜히 말을 걸고 싶다. 분명 이야기가 많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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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소란스럽고 복잡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왔다. 책 읽기에는 한가하고 조용한 시골이 낫겠다고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시골 작은 집에서도 책 읽을 틈 내기가 쉽지 않다. 집 안에도 집 밖에도 할 일이 잔뜩 이다. 일 하나를 마칠 때마다 할머니는 기대한다. ‘아 이제야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지만 일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린 양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봄을 보냈는데 과일을 따야 하는 여름이 온다. 과일은 계절이 바뀌기 전에 잼이 되어야 하고 바뀐 계절은 가뭄과 장마를 차례로 부른다. 타는 듯한 더위와 눅눅한 습기 속에서 할머니는 책 읽을 시간도 없이 일상을 지켜내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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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처럼 불평하지 않는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장작을 쪼개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귓가에 할머니의 잔소리가 울린다. ‘네가 하는 일이 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암만. 책 읽기도 좋지만 삶의 기초부터 잘 챙겨라. 책은 좀 기다렸다 읽어도 괜찮아. 오래 묵으면 재미가 더해’ 이렇게 달콤한 잔소리라니, 답답하던 마음이 좀 풀린다. 내 뒷모습도 할머니처럼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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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겨울이 왔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 평화롭고 조용한 계절, 마음껏 책 읽기 좋은 시간. 할머니는 얼마나 기다렸을까. 겨울밤이 길어서 다행이다.

잠든 아이의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마음껏 책 읽기 좋은 시간은 아직 한참 남은 듯하다. 괜찮다. 읽어야 할 책이 점점 늘어날 것이니, 오히려 더 즐거운 일이다. 당장 할머니처럼 목록을 만들어야겠다. 내 목록에 올라올 책은 몇 권이나 될까.

  Information

<책 읽기 좋아하는 할머니> 글: 존 윈치 | 역자: 조은수 | 출판사: 파랑새어린이 | 발행: 2000.03.31 | 가격: 12,000원

 

/사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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