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스치는 조각
출근길에 스치는 조각
2017.02.17 17:28 by 청민

조각이란 말을 좋아한다. 꼭 사람 마음과 닮은 것 같아서, 삶의 순간들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조각이란 말은 내게 유난히 애틋하다.

나는 100%의 마음을 믿지 않는 편이다. 한 가지 감정으로 마음을 온통 채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을 100% 확신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마음의 완전을 잘 믿지 않는다. 대신 내가 믿는 것은 사랑하지만 밉고, 질투하면서도 좋은, 그런 조각조각의 감정들이 섞인 마음이다. 작은 천 조각을 더하고 덧댄 것 같은. 조각이란 말은 꼭 그런 사람의 마음과 닮은 것 같아 애틋하다.

조각은 우리 사는 순간들과 닮았다. 생각해 보면 오늘 하루도 아주 작은 형태의 조각들로 쪼갤 수 있지 않을까.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는 수없이 다양한 조각들을 만나고 순간을 채우며 살아간다. 처음부터 완성된 하루라든지, 완전한 만남이라는 것은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조각은 일부이면서, 하나하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전체일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그런 조각들이 있다. 오늘의 기분과 기억을 연결시켜 만들어낸, 따뜻하게 하루를 채워주는, 그런 조각들이. 요즘 매일 반복해서 마주하는 순간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내 하루를 채우는 이 평범한 조각들을 꽤 아끼게 되었다. 뭐랄까, 기대하게 되었다고 할까. 반짝반짝 빛나는 아침, 출근길에 스치는 나의 소중한 조각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03-1

am 06:00의 조각

여름만 되면 나는 일찍이 잠에서 깬다. 집 근처 100년 된 성당에서는 아침 여섯시마다 댕댕댕, 5분 동안 종을 울린다. 무더위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틈을 타고 종소리가 방으로 흘러 들어와 아침을 때린다. 댕댕댕, 무거우면서도 상쾌한 종소리에 어설프게 잠을 깰 때마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잠든 것을 매일 꼬박꼬박 후회한다. 처음엔 그 종소리가 싫었다. 너무 이른 시간부터 잠을 방해하는 것 같았고, 댕댕 울리는 소리가 둔탁한 느낌을 줘서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종소리에 맞춰 잠에서 깬다. 핸드폰 알람이 따로 필요 없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보다 먼저 깨어 종소리를 기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며 맞는 아침은 나로 하여금 꼭 여행객이 된 기분을 선물했다. 고즈넉한 낯선 도시의 높은 성에서 눈을 뜨는 느낌이랄까. 100년이 넘은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커튼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작은 햇살. 그토록 게을렀던 내가 아침 여섯시에 부스스한 머리칼을 뒤로 넘기곤 눈을 비비며 아침을 맞이한다.

am 06:30의 조각

대충 눈곱을 떼고 양치를 한 후, 손에 립스틱을 쥐고 정신없이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거울로 퉁퉁 부은 아침의 얼굴을 살핀다. 대체 누구를 닮아서일까. 아침만 되면 얼굴의 붓기가 장난이 아니다. 입술을 썰면 세 접시는 나올 것 같다. 매일 아침 나는 거울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퉁퉁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1층까지 내려가는 시간은 고작 30초. 나는 그 30초 동안 최선을 다해 아침의 나를 조금 더 괜찮게 다듬는다.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긴다. 거울 속의 나는 참 못나게 보이지만, 잠에 취한 와중에도 다가온 하루를 기쁘게 맞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조금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am 06:40의 조각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 낡은 창문과 마주친다. 창문에는 주황색 꽃들이 넝울넝울 맺혀 있는데, 꽃 이름에 무지한 나는 처음엔 주황 나팔꽃인 줄 알았다. 능소화. 그 꽃의 이름은 능소화였다. 여름에만 피는 꽃. 양반집에서나 볼 수 있었다는 주황 꽃. 하지만 내가 매일 마주하는 능소화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곳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창문은 까만색이었다. 창문의 색만 보았을 땐, 그 까만색이 처음부터 창의 색이었는지 아니면 먼지가 뿌옇게 쌓여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한 외로운 창이 아닐까 홀로 상상하곤 했다. 까만 창문에는 까만 철창이 달려 있었고, 유리창엔 그물 같은 불투명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능소화는 낡은 창문의 외로움을 달래주러 온 소녀 같았다. 소녀는 까만 창 테두리를 칭칭 둘렀고, 꽃봉오리를 창밖으로 내었다. 능소화는 내가 걷는 골목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매일 아침 내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창에서 아침노을이 망울망울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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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6:42의 조각

능소화가 있는 낡은 창 오른쪽 골목으로 꺾으면 복실이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가 쫄래쫄래 골목에 마중 나와 있다. 두 손으로 들면 쏙 들릴 것 같은 작은 복실이는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골목에 서서 나를 응시한다. 복실이는 내가 걸어오는 곳에서부터, 내가 가는 방향까지, 고개를 따라 움직이며 시선을 던졌다.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눈짓을 보냈다. 나는 이 골목을 들어서기 전부터 찰랑이지만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털을 가진 복실이를 기다리게 되었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봐 준다는 것에 괜히 마음이 뜨거워지곤 했다.

am 06:44의 조각

복실이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골목보다는 조금 큰 길에 들어선다. 매일 사람들이 가득 차던 복작복작한 길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게 묘하다. 이 길은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봄과 여름 사이엔 항상 두 번의 축제가 열렸고, 최근 향수 어린 관광지라는 이름으로 음식점과 카페가 한 달에도 몇 번씩 바뀌는 곳이었다. 그 길에 온전히 혼자 서 있다. 괜히 이 길이 전부 내 것이 된 것처럼 설렌다. 차가 다니지 않고 인적이 없는 시간. 길고 긴 길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am 06:45의 조각

그 골목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다. 예전엔 교회가 담쟁이로 덮여 있어 분위기 있고 예뻤는데, 얼마 전 보수 공사를 한 이후로는 조금 낯설어졌다. 매일 화장하던 친구의 민낯을 본 기분이랄까. 벽돌로 지어진 교회, 뾰족이 올라간 첨탑. 평소엔 관광객이 많아 유심히 보지도 않았던 교회를, 나는 유명한 관광지를 빌려 홀로 구경하는 관광객처럼 구경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누구의 강요도 없이, 구석구석. 어제는 첨탑을 구경하고, 오늘은 창문을 유심히 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홀로 교회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am 06:48의 조각

교회 사이의 골목을 쭉 타고 올라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는다. 새롭게 마주한 골목의 중간엔 삼계탕 집이 있고 정면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학교에는 지난 밤 당직을 하셨던 선생님들이 족구를 하고 있다. 통통 잘 튀는 공이 아닌 어렸을 때 갖고 놀 법한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섞인 공으로. 머리가 하얗게 샌 선생님들이 공을 바닥에 툭툭 튕긴다. 푸석푸석한 탄성이 조금 딱하게 느껴졌지만 이른 시간부터 웃음소리로 학교를 채우는 선생님들을 보니 그것은 참 부러운 것이 되었다. “어이! 여기로 보내!” 선생님들의 흥분 섞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뜨겁게 데웠다.

am 06:50의 조각

학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삼계탕 집 뒤편으로 나오게 된다. 거기엔 아침마다 홀딱 벗은 닭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옹기종기 쌓여 있다. 까만 머리를 높게 묶고 분홍 고무장갑을 끼고 분홍 앞치마를 입은 아주머니가, 홀딱 벗은 닭을 뽀얗게 목욕시킨다. 아마 저 닭들은 따뜻한 삼계탕이 되어 손님들에게 대접되겠지. 그들은 한 그릇의 위로가 되기 위해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삼계탕 집 아주머니의 손이 점점 바빠졌다.

57-4

am 06:52의 조각

삼계탕 집을 지나 뒷골목으로 쭉 걷다 보면, 산책하는 부부를 마주한다. 예순은 되어 보이는 부부는 언제나 서로의 팔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서로를 의지한 손과 손에는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깊은 시간이 존재하는 듯 했다.

두 사람은 앞을 보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을 의지했고, 남편은 하얗고 긴 지팡이를 짚었다. 박자를 맞추는 메트로놈처럼 왼쪽과 오른쪽을 탁탁 가볍게 치며 길을 찾았다. 그 골목엔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아침 햇살이 아주 예쁘게 들어왔고, 부부는 매일 아침 새로운 햇살을 받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며 한편으론 숭고하기까지 해, 나는 늘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산책하는 부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am 06:55의 조각

그렇게 나는 긴 아침 출근길을 걸어 샌드위치를 싸기 위해 가게로 들어선다. 탈의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는다. 나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는구나. 얼굴은 아직도 부어 있는데, 마음은 붓기 하나 없이 차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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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쩌면 조각과 조각이 모여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처음부터 대단한 하루가, 처음부터 대단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사랑은 조각과 조각이 모이는 행위이고, 작은 조각들이 쌓이면서 하나의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하루는 수많은 조각들로, 수많은 마음들로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생각한다. 아침을 밝히는 이 조각들을 참 사랑한다고.

사랑과 조각이란 말을 좋아한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청민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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