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엄마와 나는 자주 만났다. 강원도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에 찾아온 엄마. 반가웠지만, 반갑지 않았다. 왜냐면 그만큼 아픈 곳이 많아졌다는 뜻이니까. 엄마가 서울에 올 때마다 우리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엄마는 또 심야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역시나 짐이 한 보따리였다. 무거웠다. 아니 이걸 어떻게 혼자 들고 온 거야? 심통이 났다.
“엄마, 이게 다 뭐야?”
“열무김치랑 부추김치 담가 왔지. 사과랑 배랑, 포도도 있어.”
“과일은 우리 동네 시장 가서 같이 사오면 되잖아. 무겁게 뭘 바리바리 싸들고 와.”
“아니야. 이게 서울 과일이랑은 달라. 다 고랭지! 유기농이야.”
고랭지, 유기농은 개뿔. 그냥 동네 시장에서 사 온 거면서. 나는 사과랑 배랑 포도가 너무너무 미워서 냉장고에 퉁 처넣어버렸다.
내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엄마는 청소를 시작했다. 입에 잔소리를 달고선 방바닥을 쓸고 닦고, 주방 청소, 냉장고 청소, 욕실 청소까지. 혼자서 바빴다. 미리 싹 집안 대청소를 해뒀건만 엄마에겐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비누를 놓아 둔 위치, 그릇을 쌓아둔 모양, 수건을 개어놓은 방법까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나 보다. 아프다는 사람이 아무리 그만하래도 가만히 앉아 있질 않는다. 그런 엄마를 보며 나는 심술보가 빵빵하게 차올랐다. 한참 후에야 엄마는 고무장갑을 벗고 내 옆에 앉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냉장고로 달려갔다.
“딸, 요게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 포도를 꺼내 씻는 엄마. “어머나, 다 물러버렸네. 아까워라.” 물렀거나 말거나. 난 별로다. “요고요고 얼마나 맛있는데, 먹어 봐. 아우, 맛있어.” 쫑알거리며 포도를 내미는 엄마. “딸, 맛있지? 진짜 맛있지?” 한 알 똑 따서 먹어보니, 달긴 달다.
하지만 나는 암말도 하지 않았다. 툴툴대며 먹은 포도가 맛있기까지 하니 오히려 더 미워죽겠다. 그냥 몇 알만 먹고 말았다. 무뚝뚝한 딸내미 곁에서 엄마는 조용해졌다. 텔레비전 혼자만 번쩍거리며 시끄러웠다.
다음날 아침, 병원에 갈 짐을 싸는데 엄마가 까만 봉다리 하나를 챙겼다. 포도였다. 너무 맛있어서 병원에서 혼자 먹을 거랬다. 하지만 종일 병원에 있던 엄마는 포도를 까먹을 여유가 없었다. 치료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나는 대기실에 멀뚱히 앉아서 간호사들이 드나들 때마다 열렸다 닫히는 치료실 자동문만 쳐다보았다.
그날 엄마는 핼쑥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일찍 잠이 들었다. 잠든 엄마를 바라보다가, 문득 가방 속에 넣어둔 포도가 떠올랐다.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놔야겠다. 나는 까만 봉다리에 꽁꽁 싸둔 포도를 꺼내 씻었다. 그런데 촉감이 이상했다. 물컹물컹. 죄다 짓무른 포도알뿐이었다. 아. 엄마는 못 먹을 것들만 골라서 혼자 먹겠다고 넣어 갔던 거다.
나는 어차피 먹지도 못할 상한 포도알들을 씻었다. 그저 씻고 또 씻었다. 물컹물컹. 다 씻은 포도알 위로 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들만 똑똑 떨어졌다. 그냥 말해줄 걸 그랬어. “엄마, 포도 진짜 달다. 맛있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