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2017.03.22 18:21 by 고수리

툭 툭 툭 툭.

손마디에 내 심장박동을 느끼며 오래도록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살면서 그렇게나 무시무시하게 외롭다고 느꼈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중3 여름, 감기가 심해서 조퇴를 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을 때일 것이다. 집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일하고 공부할 시간에 나만 거꾸로 움직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하얀 커튼 사이로 나른한 햇살이 쏟아졌다. 거실 바닥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질반질했고, 바람결을 따라서 커튼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림자가 닿는 그곳엔 낡은 패브릭 소파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벗고 소파 위에 벌러덩 누웠다.

누운 채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텅 빈 집. 먼지가 철가루처럼 달라붙어 있는 텔레비전, 말없이 가지를 내뻗은 화분들, 물기가 바싹 마른 싱크대, 가지런히 정리된 식기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식탁. 집은 조용했다. 가끔 위이잉하고 냉장고 모터가 돌아갔고, 창밖에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더 귀를 기울였을 땐, 시계 초침이 틱틱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몽롱한 감기약 기운과 일정한 시계 소리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깊은 낮잠이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어둑해져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잠이 덜 깬 머리는 어지러웠고 아픈 몸은 젖은 빨래처럼 무거웠다. 눈앞엔 짙은 고동색 천장이 낮게 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딘가 아주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천장 위로 손을 뻗어 보았다. 어렴풋이 실루엣만 보이는 손등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이 먹먹했다. 모든 사물이 색채를 잃고 희미한 형체로만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적막했다. 아까의 아늑한 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곳은 어딘지 모를 낯선 장소, 나는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쓸쓸해질 수가 있다니.

그때의 경험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일까. 혼자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항상 기분이 나빴다. 너무 외로워서 기분이 나빴다. 자고 일어난 직후, 바보처럼 몽롱한 정신과 주변의 낯선 풍경, 아무것도 없는 적막함, 지나가버린 시간과 사라져버린 색채의 쓸쓸함. 그런 느낌들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사무치게 확인시켜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혼자 남겨진 집에서 낮잠을 자고 나면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미안해. 오늘도 많이 늦을지 몰라.” “우리 하는 일이 그렇지 뭐.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돈 많이 벌어와, 남편.”

남편은 주말에도 출근을 했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한꺼번에 몰려든 작업을 하느라 며칠째 쪽잠을 자며 일하고 있었다. 주말에도 함께하지 못하는 게 무척이나 미안한지, 출근하는 남편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손을 흔들었다. 남편을 보내고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밀린 빨래도 했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한가하게 책을 읽는 주말. 혼자라도 이런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 안은 어둑해져 있었다. 이어폰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은 훌쩍 지나가버렸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방 안은 어두웠고, 나는 혼자였다. 손을 더듬거리자 딱딱한 책 모서리가 만져졌다. 그 채로 가만히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한참 뒤,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 나는 곁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이불도 덮지 않고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렴풋이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한쪽 이어폰을 뺐다. 그러자 새근새근,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방 안에는 열린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저녁 냄새가, 눅눅한 공기가, 남편의 숨소리가, Cat Power의 노래 ‘The greatest’가 떠다니고 있었다. 색채와 표정을 잃은 남편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울컥, 마음이 이상했다. 나는 그가 외로워 보였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쓸쓸해질 수가 있다니. 쓸쓸하고 외로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곤히 잠든 남편은 아이 같기도, 노인 같기도 했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가락 마디마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와 앞으로 살아갈 불투명한 미래가 만져지는 것 같아 손끝이 저릿했다. 그럼에도 우린 꿋꿋이 살아가겠지. 몇 번이고 텅텅 비어 낯설고 어둑해질 이 세상에서, 내가 외로울 땐 당신이 곁에. 당신이 외로울 땐 내가 곁에. 그렇게 우린 함께 살아가겠지.

가만히 남편의 손목을 잡아보았다. 툭 툭 툭 툭. 손마디에 뛰는 그의 심장박동을 느끼며 오래도록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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