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대는 고요하다, 청각장애인 배우 이효진 씨
나의 무대는 고요하다, 청각장애인 배우 이효진 씨
나의 무대는 고요하다, 청각장애인 배우 이효진 씨
2014.10.15 14:43 by 더퍼스트미디어
연극 <가장 보통의 존재> 에 출연한 청각장애배우 이효진 씨


 

“저기 아가씨, 뭐 떨어졌는데…”

횡단보도, 정확히는 ‘무대 위에 마련된’ 횡단보도 앞. 황급히 길을 건너려던 효진 씨가 두툼한 서류봉투를 떨어뜨리자, 한 아줌마가 다급히 효진 씨를 부른다. “이것 봐, 아가씨, 아가씨!” 효진 씨 등 뒤에 꽂히는 외침은 차츰 거세고 날카로워진다. “아니, 뭐야!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눈을 흘기며 거칠게 뒤를 따르는 아줌마. 호의가 적의(敵意)로 바뀌는 데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소란 끝에 안착한 사무실. “빨간 종이만 치워놔”라는 상사의 말에 효진 씨가 부산을 떤다. 빨간… 아니 파란 종이를 치우는 효진 씨. 입술을 읽고 소통하는 효진 씨에게 ‘빨간’과 ‘파란’의 발음기호는 너무 비슷하다. “아이고, 정말 답답해서…” 상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상사가 직원들과 수시로 나누는 ‘뒷담화’를 효진 씨가 듣지 못하는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지난 7월 19일, 20일 양일에 걸쳐 서울 ‘284 RTO 공연장’(구 서울역사)에서 치러진 연극 ‘가장 보통의 존재’는 효진 씨의 자기 관찰 보고서다. 27년을 고요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삶이 대본의 토대가 됐다. “일반인들은 왜 클럽같이 시끄러운 곳을 즐길까? 500원 동전이 떨어질 때 어떤 소리가 날까?” 효진 씨의 오랜 고민들이 고스란히 대본의 주요 페이지를 장식했다. 연출 하은빈(22•서울대 미학과 3) 씨와 3달 넘게 논의하며 이야기를 만들었다. 하은빈 씨는 “청각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효진 씨의 삶을 무대 위에서 진솔하게 드러내고 싶었고, 소리 언어만이 정상적이고 우월한 것이라는 편견도 지적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배우 이효진씨와 연극 <가장 보통의 존재> 연출가 하은빈 씨


 

효진 씨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음소거’ 시킨 음악프로처럼 답답했다. 한창 수다에 목마른 여학생들의 대화도, 제대로 된 학업에도 끼지 못했다. 수업에 자막을 제공해준 건 교육방송의 언어 과목이 유일했다.(덕분에 이 씨는 대입 수능 언어영역에선 한 문제만 틀렸다.) 이 씨는 상대방의 입술을 읽어 단어를 추리하는 ‘독순술’을 배웠을 뿐, 따로 수화는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청각 장애인이면서 무슨 배짱으로 수화도 못 하냐”는 냉소 섞인 질문도 꽤 듣는다. 이런 그녀에게 예술은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했다. 작년까지는 말이다.

“작년 3월,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장애문화예술연구소 ‘짓’을 알게 됐어요. 예술을 수단으로 장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는 취지가 맘에 들어 합류하게 됐죠.” 그녀는 현재 이곳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실 이번 작품은 배우 이효진의 첫 무대다. 무대에 오르기까지 망설임도 많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관객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덜컥 겁부터 났어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무대 위에 글자를 던져볼 생각도 하고, ‘관객들이 아예 소리를 못 듣게 하면 어떨까’라는 제안도 했다. 고민의 과정은 험난했지만, 대신 조금씩 자신감을 채워줬다. ‘장애가 무대 위에서 독특한 무대 장치나 기발한 소품처럼 연극적 요소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생겼다. 제약 없이 상상할 수 있고 또 그 상상을 무대 위에 실제로 이끌어 내는 힘, 효진 씨는 점점 더 무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공연이 끝난 후 가족, 친구 등 많은 사람이 “감동했다”며 격려했다. 하지만 효진 씨의 표정이 어딘가 씁쓸해 보였다. “공연에 감동했다고 말해주신 관객이 많았어요. 정말 감사하죠.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감동을 주려고 기획한 작품이 아닌데 왜 감동하셨을까? 오히려 건조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 작품인데 말이에요.” 장애예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공연의 완성도 위에 서는 현실이 불편했다. 그녀는 “장애라는 코드를 빼고 연극의 한 작품으로서 제대로 피드백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공연 후 찾은 카페. 효진 씨가 어눌하게 말했다. “네?” 주문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서툰 발음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그녀가 입을 열면 대뜸 사람들은 묻는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일본, 혹은 중국이라고 대답했다가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왔어요.” 아랍에미리트 출신이라고 하면 조금 편하다. 아직 아랍어로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없었다. 아랍어가 능숙한 사람을 만나면? 그땐 정말 외계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CJ 문화재단 예술감독 조용신 씨 인터뷰> “소수자 일으키는 문화예술의 힘은?” 지난 7월 31일. 청각장애인 배우 이효진 씨와 연출가 하은빈 씨를 다시 만났다. 함께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연극이 시작되자, 무대 위 배우들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은 효진 씨에게선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배우들의 대사로 채워진 연극은 효진 씨에게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수화 통역이나 자막 서비스가 없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 대본을 미리 보면, 어느 정도 줄거리를 가늠할 수 있지만, 저작권 문제로 거절당하기 일쑤다. 이번 공연 관람 전에도 대본을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척박한 국내 공연환경에서 장애인들이 더욱 편하게 문화예술을 누릴 수 없을까? 조용신(46) CJ 문화재단 예술감독을 찾아 국내 공연장의 장애인 접근성 문제와 개선방향을 들어봤다.

뉴욕 시립대에서 엔터테인먼트 공학을 전공한 조 감독은 뉴욕 브로드웨이에 거주하는 7년 동안 한해 평균 50편의 공연을 관람했다. 지난 2005년에는 공연예술의 역사와 제작환경, 공연장 환경의 변천사를 다룬 ‘뮤지컬 이야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국내 공연장에서 장애인의 공연관람 접근성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소극장이냐 대극장이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부족한 편이다. 특히 소극장의 경우에는 재정 부족으로 엘리베이터, 리프트, 장애인 전용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공연을 예매할 때 장애인석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자막, 수화 서비스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미국 브로드웨이는 어떤가.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잘 이루어지고 있나.

“전반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시각 장애인이 맹인견과 함께 공연을 보는 모습을 본적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청각 장애인을 위해서 자막과 수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날도 있다. 사전에 날짜를 공지하기 때문에 원하는 날짜를 선택해서 관람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공연장 직원들이 장애인에 대해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도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들어 올릴 리프트 시설을 작동하려면 공연장 직원의 도움이 필요하다. 장애인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흔쾌히 도와주는 모습에서 배려심이 느껴졌다.”

-장애인의 공연관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장애인을 위한 제반 시설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지만 의식 수준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극장은 특별한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어야 한다. 누구나 공연장에 들어가서 편하게 공연을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단 한 명의 장애인이 공연장을 찾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글/김지현
김지현
소셜에디터스쿨 청년세상을 담다 1기
2주간 체험한 기자란 직업은 그 어느 직업보다도 멋졌지만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다. 그러나 뜨거운 취재 현장의 중심에서 느껴지던 단단한 열정 덩어리들의 실체를, 그 실체를 향해 전력 질주하던 사람들의 뜨거운 호흡을 느끼며,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향한 내 마음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그린 라이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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