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는 있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2017.05.23 18:30 by 고수리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지 않을 거란 걸.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짐작했다. 우리 집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그리고 엄마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선 눈치 챘다. 오늘 밤에도 아빠는 술에 취해서 들어올 거란 걸.

크리스마스고 뭐고. 하룻밤 자고 나면 12월이 훌쩍 지나가 있길 바랐다. 내년이면 나는 열한 살이었고 앞자리 숫자 10을 넘겼으니 제법 큰 어린이였다. 하지만 내 동생은...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태평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생을 힐끗 쳐다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녀석은 아직도 산타클로스를 믿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 동생의 머리맡에는 매끈한 미니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우와아아! 미니카!” 최신형 미니카를 껴안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한 녀석은, 대뜸 내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미리 예약해 두었다. 당연히 미니카였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는 동생의 여덟 살 인생 최악의 날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녀석의 머리맡에는 미니카는커녕, 미니카보다 못한 선물조차 없을 것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부터는 산타클로스가 없으리란 걸 나는 알아버렸다. 산타클로스는 없다. 우리 집에는 이제 산타클로스가 없다.

santa

산타클로스는 남들보다 조금 더 가난하고 조금 더 불우한 집에는 일찍이 발길을 끊었다. 그 집 애들은 울고불고 떼쟁이도 아니고, 티 없이 착하고 예쁘기만 하더라만. 그래도 산타클로스는 더 잘 살고 더 행복한 집들만 찾아가 따뜻한 방안에 오래오래 머무는 것이었다. 슬픈 일이었다. 없는 부모가 나쁜 산타클로스 취급까지 당해야 하는 현실은 슬펐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러고도 모른 척 꾸욱 입을 다물고 주변 눈치 보기가 몸에 밴 여자애. 나는 그런 애였다. 아빠 눈치를 보며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고, 엄마 눈치를 보며 다가가 숟가락을 놓거나 설거지를 도왔다. 갖고 싶은 인형이 있어도 문구사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돌아왔고, 신발 한 켤레를 사더라도 금세 커버린 발가락이 아파서 물집이 잡힐 때까지도 암말 않고 신고 다녔다.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알아버린다는 것.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것들을 보고도 모른 척 한다는 것. 더 이상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아버린 것보다 어른들의 세계는 훨씬 더 불행했다.

아이고 야야, 내가 이제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살겠노. 헛헛한 푸념을 늘어놓는 할머니가 어린애 옷을 뒤집어쓰고도 열 살 인척, 다 모르는 척 눈치 보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든 늙은 애였다. 조숙하고 영악했다. 어딘가 잔망스런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말썽을 안 부리고 뭐든지 잘하기만 하면, 우리 가족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함이 있었다.

나는 내 동생을 지켜주고 싶었다. 여덟 살이면 아직 그런 것들을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우당탕탕 말썽꾸러기로 못 말리는 개구쟁이로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길 바랐다.

끙끙대며 고민하던 나는 저금통을 품에 안고 집 앞 문구사로 달려갔다. 그린문구센터로.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서 나와 직진으로 뻗은 길을 곧장 내달리면, 기차도 잘 다니지 않는 오래된 철길 건널목 하나가 나타났다. 그 건널목을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그곳에 외딴 섬처럼 그린문구센터가 황황히 빛나고 있었다.

센터라는 이름이 머쓱할 정도로 겨우 다섯 평 남짓한 작은 문구사였지만, 내게는 황홀한 꿈의 장소였다. 학교 앞 해묵은 문방구와는 달랐다. 온실처럼 사방이 투명한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문구사. 유리벽 너머로는 예쁘고 근사한 온갖 종류의 학용품과 장난감들이 오밀조밀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네모난 종합선물상자 같았다.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그린문구센터를 찾아갔다. 문구사 안에 전시된 물건들과 바비 인형을 오래도록 구경했지만, 끝내는 겨우 백 원짜리 지우개나 하나씩 사가는 게 전부였다. 백 원짜리 단골이래도 매일 찾아오는 내가 귀여웠는지, 주인아줌마는 종종 땅콩 캐러멜 하나씩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그린문구센터에 들어간 나는, 단숨에 장난감 코너로 달려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제일 저렴해 보이는 미니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줌마에게 미니카와 저금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니?” “저금통에 있는 돈으로 이거 사려고요.” 아줌마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줌마는 저금통 철 뚜껑을 뜯어내고 카운터 바닥에 돈을 쏟았다. 촤르르 샛노란 동전들이 쏟아졌다. “십 원짜리가 많네.”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나도 아줌마의 손을 따라 함께 동전을 셌다. 제법 양이 많았다. 하지만 눈짐작으로 세어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동전을 모두 센 아줌마가 말했다. “얘, 이걸로는 턱도 없구나.” “제일 싼 미니카도 못 사요?” “응, 이걸론 안 돼. 미니카가 얼마나 비싼데. 엄마한테 돈을 더 달라고 하렴.” 아, 이걸론 안 되는 구나.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근데 여자애가 웬 미니카? 꼭 미니카를 사야 돼?”

“선물 주려고요.”

“누구한테?”

“제 동생이요.”

“아, 그 꼬맹이.”

아줌마는 그 개구쟁이 녀석 잘 알지, 하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잘 봐. 동전이 전부 다 합쳐서 삼천 원이 안 돼.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몇 백 원쯤 아줌마가 보태줄게. 미니카 말고 삼천 원짜리 선물을 골라보려무나.”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선물을 골랐다. 그때 은색 철 필통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은색 철 필통 표면에 작은 기차가 조르르 그려져 있었다. 전부터 내가 가지고 싶었던 예쁜 필통이었다. 그 필통과 연필 한 자루, 캐릭터 지우개를 골랐다. 딱 삼천 원 어치 선물이었다. “동생 생일이 크리스마스인가 봐?” “네...” 아니요. 내 동생 생일은 9월이었다. 얼떨결에 거짓말을 한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필통 안에 연필과 지우개를 넣었다. 아줌마는 빨간색 별 포장지로 필통을포장하고 금색 리본까지 달아주셨다. 아주 예뻤다. 이걸 동생에게 몰래 전해줄 생각에 헤실헤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누가 볼 새라 얼른 코트 안에 필통을 숨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걸을 때마다 품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났다.

크리스마스이브 밤. 동생은 일찍 잠이 들었다. 아빠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왔고, 소란스러운 밤이 흘렀다. 그래도 동생은 쿨쿨 잘만 잤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소란이 잦아들고 새벽이 되었을 때, 몰래 일어나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동생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편지를 쓰면 내 글씨가 탄로날까봐 덩그러니 선물만 두었다.

훌러덩 배를 까고 자고 있는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도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고선 동생의 머리맡에 반짝이는 선물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메리 크리스마스.’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잠이 들었다. 짤막짤막 이어진 꿈속에선 동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동생은 머리맡의 선물을 발견했다. 우와아아! 소리를 지르며포장지를 뜯는 동생. 지켜보는 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 이게 뭐야.” 포장지 속의 은색 필통을 발견한 녀석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좋겠다! 산타클로스가 선물 줬나보네.”

“이거... 미니카가 아니잖아!”

녀석은 씩씩거리더니 선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재빨리 필통을 주워 보니, 필통 모서리가 우그러져 있었다. 속상했다. 나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온 엄마에게 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엄마, 산타클로스가 이상한 선물 줬어.”

“응? 선물?”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포장지가 반쯤 뜯긴 필통을 바라보았다. “누가 준 거지?” 엄마는 우는 동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거의 울 듯 한 얼굴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뗐다. 어떻게 된 일이지? 엄마가 눈짓으로 물었지만 홱 고개를 돌려버린 채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 나는 몰랐다. 아무 것도 몰랐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엄마가 내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어린애였다. 철든 척 했어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다. 잊지 못할 눈물의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어른이 되어 이 글을 쓰기로 작정한 어느 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거 언제 알았어?”

“아마도 열 살 때쯤?”

“그래? 그럼 받았던 선물 중에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미니카! 태백에 살 때였나? 진짜 대박! 완전 멋있었는데!”

“혹시 필통 받았던 건 생각 안 나?”

“필통? 그런 게 있었나? 아... 아아. 생각난다. 은색이었지? 그거 진짜 싫었어.”

그래,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그 선물, 사실 내가 줬던 거란다. 찬바람을 헤치고 달려가 저금통을 다 깨고, 밤새 잠도 못 자고 네 머리맡에 몰래 놓아두었단다. 그 해에는 내가 산타클로스였어.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응? 아니야.” 나는 전부 말해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살다보면 지켜주고 싶은 거짓말 하나쯤은 있다.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착한 거짓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간절히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아이였다. 우리를 사랑한 누군가가 온힘을 다해 우리를 지켜주었고, 우리는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것들을 모르고 자랐다.

시간이 흘러 더럽고 무섭고 힘들고 슬픈 어른들의 세계를 알게 된 후에는, 이제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지켜주려 한다. 온힘을 다해 지키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산타클로스가 된다.

산타클로스는 있다.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산타클로스는 있다.

이 콘텐츠는 첫눈출판사에서 출간한 책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의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고수리 작가와 책에 대해 더욱 궁금하신 독자분들은 첫눈출판사 브런치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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