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이웃의 문제를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지체계의 손발이 되어주는 현장 활동가들이죠. 누구보다 귀한 일을 하는 손길이지만 이들의 처우·인식·업무환경은 여전히 박하기만 합니다. <더퍼스트미디어>에서는 9월 7일 ‘사회복지의 날’을 맞아 각 분야 복지 현장 활동가들의 고백를 통해 그들을 재조명하는 특별기획 ‘이웃사랑 마스터를 말하다’를 연재합니다. |
「 “로빈. 지금 바빠?”
어디선가 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빈’은 사무실에서 쓰이는 내 이름이다.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역시나, 이번에도 잡다한 서류 작업 부탁이다. 지금 시간은 6시 28분. 정시퇴근 2분 전이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지만 어떻게 거절할지 모르겠다. 다른 동료들은 퇴근 준비가 한창이다. 영화를 보러, 요가 강습을 받으러 하나둘씩 사무실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친구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때쯤, 취업 준비를 하던 친구가 내 업무에 대해 묻는다. ‘글 쓰는 일’이라고 하자 곧바로 부탁이 들어온다. “혹시 오늘 밤에 내 자소서 좀 봐줄 수 있어?” 지금 시간은 밤 열한시. 내일 아침엔 어김없이 출근해야 한다. 그래도 거절할 순 없다. “알겠어. 이따가 한번 줘 봐.” 다음날 나는 어김없이 지각했다.
금요일, 한 주는 끝났는데 마음은 시원치 않다. ‘카카오톡 받은 파일’폴더엔 여기저기서 받은‘부탁’들이 수두룩하다. 처리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저 중엔 촌각을 다투는 일도 있다. 이번 주말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려야지. 그때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온다. 이번 주말에 가고 싶은 곳이 있단다. 중요한 일이 있지만 흔쾌히‘좋다’고 한다. 원래 일은 밤에 하는 거니까…
내 마음 속 거절 세포는 죽었다.」
지난 6일 찾아간 곳은 대전시 서구에 위치한 굿네이버스 좋은마음센터 대전서부.
똑똑.
에디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심리상담을 받아보고 싶은데요.”
오정미(50) 임상심리사(굿네이버스 좋은마음센터, 이하 상담사)가 환하게 에디터를 맞았다. 곧바로 작은 방에 입실. 한쪽 벽엔 창이 나 있고, 다른 쪽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은근한 긴장감. 심리상담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심리상담 0회, 정신과 진료 0회, 기타 모든 상담 0회. 마음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많았지만 실제로 그걸 고칠 노력은 하지 않았다. 심리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저 뻔한, 좋은 얘기만 듣고 올 거란 선입견이 있었다. 옆방에선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오 상담사는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친구들이 음악치료를 받는 소리”라고 했다.
에디터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였다. 상담에 대한 비밀 엄수가 적힌 내용이었다. 심리상담사의 제 1원칙은 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의 비밀을 지켜주는 것. 오 상담사는 “상담사와 친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했다. 사실 친구에게 말하는 비밀이란 대체로 ‘공공연한 비밀’일 때가 많지 않은가. 하지만 상담사는 다르다. 반드시 내담자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상담사의 역할은 무조건 조언이나 충고를 하는 게 아니다.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 그러기 위해선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걱정 없이 털어 놓아야만 한다. 펼친 종이 하단에는 원하는 상담 분야에 대한 체크박스가 있었다. 학업‧장래‧대인관계부터 시작해 성, 외도에 대한 항목도 있었다. 문득 ‘이런 문제를 얼마나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읽었다는 듯 오 상담사가 말했다.
“상담실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애쓰고 노력하다 온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상담을 받으면 자신의 문제가 과연 해결될까 하는 의구심도 많아요. 이런 의구심을 긍정적인 태도로 변화시키기 위해 정확한 상담목표를 세워주고 있어요. 의구심을 긍정적인 메시지로 바꾸는 거죠.”
‘반드시 목표가 있다’라… 그냥 고민 말하고 들어주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치밀한 세계다. 비밀 엄수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대인관계’ 항목에 체크를 하고 내용을 적었다. ‘거절을 쿨하게 하고 싶다.’ 명확한 목표였다. 목표를 정했으니 이제 이 방에서 나가면 에디터는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걸까? 오 상담사는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오늘은 가장 초기 단계로,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상담은 장인의 예술 작업 같았다. 내담자에게 필요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긍정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했다. 상담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속마음을 나누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시계를 살며시 내려다봤다. 순식간에 흘러간 시간, 시간을 좀 더 달라 떼를 쓰고 싶어질 정도였다.
상담사들에게도 ‘시간’은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라고 한다. 이곳엔 어린이부터 중년 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내담자가 방문한다. 그중엔 시크한 사춘기 청소년 내담자도 있다. 오 상담사는 “어렵게 마음의 문을 연 사람일수록 상담 시간이 아쉽다”며 “상담사는 순간의 감정과 판단이 중요한 직업”이라 말했다. 내담자들에겐 상담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삶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담 시간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오 상담사는 “상담시간은 내담자와 상담자의 약속이며 이는 자아개념을 만드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속내, 상담사들은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는 걸까? 오 상담사는 살며시 고개를 가로 저으며 “우리도 모든 내담자들의 사연에 완전히 공감하진 못한다”고 했다. 오히려 어설픈 공감은 독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심리상담사도 똑같은 사람. 대신 이들은 내담자의 이야기에 최대한 관심을 가진다. 이들의 문제를 묻기보단,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려 노력하는 것. 오 상담사는 “내담자들도 어설픈 공감은 다 눈치챈다”며 “생각이 달라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도 자신의 속내를 편하게 털어 놓는다”고 했다.
상담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마음 속 문제를 면밀히 보는 것.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도록 유도하는 것. 오 상담사는 자신을 거울에 비유했다. 상담사가 내담자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담자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변화하게 된다고.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에디터는 마음속 깊은 고민들을 상담사에게 털어놨다. 언젠간 ‘거절’을 잘하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오래전 가족사부터 차근차근 풀었다. 부끄러운 느낌은 없었다. 비밀이니까.
오정미 임상심리사가 말하는 심리상담사 이야기 Q. 내담자들의 주 연령대는 어떻게 되나? Q. 상담을 통해 변화하려면 보통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가? Q. 좋은 상담사의 자질이 따로 있나? Q. 상담을 도중에 중단하는 경우도 있나? Q. 심리상담사도 상담을 받나 Q. 상담사로 일하면서 직업병(?) 같은 건 안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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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콘텐츠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국제구호개발NGO ‘굿네이버스’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