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리트머스, 대통령의 기자회견
민주주의의 리트머스, 대통령의 기자회견
2018.01.13 11:12 by 이창희

긴장한 기색의 대통령.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손을 드는 기자들. 팔이 빠져라 손을 흔드는 기자부터 양손을 모두 뻗어 올린 기자, 심지어 인형을 손에 쥔 기자까지. 저마다 시선을 끌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가운데 고민 끝에 한 명을 지목하는 대통령. 이어지는 나머지 기자들의 탄식. 2018년 새해 청와대에서 벌어진 낯선 풍경이다.

문재인 대통령 2018년 신년 기자회견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 2018년 신년 기자회견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자리, 평화, 개헌, 외교안보 등 주요 국정 이슈에 대한 구상을 밝힌 뒤 내외신 기자들과 1시간가량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

특이했던 것은 이날 기자회견의 형식. 질문 내용을 놓고 청와대와 기자단 간에 사전 협의나 조율을 거치지 않았다. 질문하고 싶은 기자들은 손을 들었고, 진행자가 아닌 대통령이 질문할 기자를 직접 지목했다. 기자들은 해당 주제 안에서 자유롭게 질문했고, 문 대통령은 즉흥적으로 대답을 내놓아야 했다. 다시 말해 ‘짜고 치는 고스톱’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맞다. 당연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우리가 당연하지 못한 방식의 기자회견을 봐 와야만 했던 것을 알고 계시는가. 그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왜 존재했는지,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 2018년 신년 기자회견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 2018년 신년 기자회견 (사진: 청와대)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렇게 이뤄진다

기자회견은 대통령이 언론을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는 창구다. 기자들이 국민을 대표해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통령이 답을 내놓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국민들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지지와 격려를 보내기도, 비판과 비난을 가하기도 한다.

국민들 입장에선 간접적으로나마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인 셈. 하지만 기자회견이 정기적인 이벤트는 아니다. 개최 여부가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지에 달린 만큼 정권마다 그 횟수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군사정권 이후 집계치를 살펴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3회, 김대중 전 대통령이 150회, 노무현 전 대통령이 150회,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회, 박근혜 전 대통령이 5회씩 임기 동안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럼 기자회견은 언제 이뤄질까? 대개는 새해를 맞거나 남북관계 등 대외적 정세 변화가 있을 때, 혹은 국가 내부적인 이슈가 있을 경우 실시된다. 청와대에서 기자회견 계획을 수립한 뒤 출입기자들에게 알리고, 기자들은 기사를 통해 이를 예고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의 연설이 먼저 이뤄지고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핵심인 질의응답 시간은 대체로 1시간 안팎이고 질문 기회를 얻는 기자는 많아야 10명 내외로 제한된다. 하지만 기자회견에는 청와대에 상주하는 100여개 언론매체의 300명 넘는 기자들이 참석한다. ‘질문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청와대 춘추관. 역대 대통령들은 주로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 이창희)
청와대 춘추관. 역대 대통령들은 주로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 이창희)

 

|잘 짜여진 ‘각본’, 썩 훌륭한 ‘연기’

그렇다면 질문 기회는 어떻게 배분될까? 다음의 사례를 보자.

#1
청와대 춘추관 출입기자단은 이번 XXX대통령 기자회견을 며칠 앞두고 기자실에서 제비뽑기를 실시했다. 300여명의 기자들이 참석했지만 ‘별’을 뽑은 행운의 기자는 불과 10명.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질문할 자격을 얻었다.

#2
OOO대통령 기자회견이 임박했음에도 출입기자단 내부에서는 질문자 선정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결국, 협의는 결렬됐고 자유질문 방식으로 기자회견이 이뤄졌다. 하지만 진행을 맡은 A 홍보수석은 특정 기자들에게만 질문 기회를 부여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해당 기자들은 며칠 전 홍보수석과 따로 만나 질문의 내용을 공유하고 조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첫 번째 사례는 비교적 민주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역대로 볼 때 몇 차례 사용되지 못했다. 반면 두 번째 경우는 논란의 소지가 큰 방법이지만 상당히 빈번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청와대 입장에서 보자. 청와대 참모진은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최대한 정돈되고 빈틈없으며 신뢰감을 주는 모습만을 노출하길 원한다. 예상을 벗어난 질문에 대통령이 당황하는 돌발적인 상황을 경계한다.

매체와 기자 입장에서는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자리에서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에 대한 욕심이 클 수밖에 없다. 수많은 매체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홍보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서다.

결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이루는 교집합에서 ‘각본’은 시작된다. 청와대는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연출하고, 기자는 (겉보기에) 날카로운 질문을 선보이며 소속 매체의 영향력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공생을 유지한다.

(왼쪽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왼쪽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자랑스럽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그렇다면 역대 대통령들의 기자회견은 실제로 어땠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로 확인되고 여론이 판단을 내린 내용들만 추려봤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서 기자회견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없거나 혹은 나쁘거나’.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매년 새해가 되면 ‘연두 기자회견’을 가졌다. 연설을 한 뒤 2시간이 넘도록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실시했다. 하지만 기자들의 질문도 대통령의 답변도 미리 마련된 각본에 따른 ‘연극’과 같았다. 서슬이 퍼런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다.

전 전 대통령의 경우 아예 이마저도 없이 국회에서의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자신이 할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냈다. 1985년부터는 연두 기자회견을 갖긴 했으나 박정희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임기 동안 전국 60곳이 넘는 언론사를 18곳으로 강제 통폐합시킬 만큼 억압적인 언론정책을 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대동소이했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질의응답에는 구체적인 정책이나 구상 대신 피부에 와 닿지 못하는 막연한 단어만 줄줄이 나열되곤 했다.

(왼쪽부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왼쪽부터)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1992년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과 뒤이어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전 군부 독재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질문을 받아 정리한 뒤 미리 준비한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얻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 타파라는 최대 치적이 말해주듯 각본 없는 기자회견을 지향했다. 대부분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격의 없이 문답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겹치는 질문을 조율하거나 질문할 기자들을 사전에 선정하는 사례는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업 CEO 출신답게 격식을 갖춘 기자회견을 선호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간 사라졌던 각본 논란에 수차례 휘말리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 각본 의혹을 부인했지만 너무 짜 맞춘 듯한 질의응답으로 엄청난 질타를 받았다. 평소 발언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비문(非文)을 자주 구사해 지적을 받은 박 전 대통령이 유독 기자회견에서는 달변을 과시하면서 의심은 커졌다. 결국, 치밀한 각본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 됐다.

청와대(사진: 이창희)
청와대(사진: 이창희)

 

|국민은 ‘완벽’이 아닌 ‘시도와 노력’을 기대한다

문 대통령의 이번 기자회견은 취임 이후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취임 100일을 기념으로 지난해 8월에 열렸다.

당시 소통을 앞세우며 의욕적으로 실시한 기자회견이었지만 이번보다 호평을 받진 못했다. 그때 역시 사전 조율은 전혀 없었으나, 사회를 맡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질문 기자를 임의로 지목하면서 잡음이 일었다.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지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 것. 여기에 이슈 주제별로, 매체 특성에 따라 질문 기회를 부여하겠다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하지만 청와대는 당시의 실수를 복기하고 미비한 부분을 보완, 불과 5개월 만에 훨씬 발전된 기자회견을 소화해냈다. 질문하고 싶은 기자들을 지목하는 것은 문 대통령의 몫이 됐고, 각본이 아닌 문 대통령의 대답은 진솔해질 수 있었다. 오히려 기자들의 질문 수준을 지적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

“문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놀라울 정도로 오랜 시간 계속됐다. 큰 매체들 뿐 아니라 여러 소규모 그리고 지역 매체들로부터도 질문을 받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질문하기 위해 사전에 선택되지 않았다. 이전 정부(그리고 백악관)와 다르다.” (안나 파이필드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기자회견을 치른 것은 아니다. 몇몇 질문에 대해서는 시원스러운 답을 하지 못했고, 기자들의 질문기회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여론의 호응은 폭발적이다. 이는 역대 정권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던, 쉽지 않은 기자회견 방식에 대한 시도와 노력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과 국민들이 마주하는 기자회견은 그 정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충분한 척도가 됐다.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고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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