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학교를 신뢰합니까?
당신은 학교를 신뢰합니까?
2018.02.08 15:57 by 류승연

이번엔 학교다. 지난 수요일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의 귓불에 보라색 멍이 들어있다. 누군가 귓불을 손가락으로 세게 쥐어서 생긴 멍이다. 전체적으로 크게 번진 멍이 아니라 딱 손가락으로 짚은 크기만큼 앞뒤로 물들어 있는 보라색. 한숨이 나지만 그냥 넘기기로 한다. 종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

다음 날 아침, 딸이 아들의 귓불을 보며 멍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안심을 한다. 밤새 색깔이 옅어졌다. 피부가 약한 아이라 쉽게 멍이 들지만 그만큼 회복속도도 빠르다. 그 날 저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딸이 외친다.

“엄마, 동환이 멍이 왜 또 진해졌어?”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아침에는 옅어졌던 멍이 다시 진해져 있다. 같은 자리에 전날 저녁과 똑같은 멍이 또 들어 있다. 이틀 연속이다. 이젠 간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가방을 열고 알림장을 편다. 이날 아들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두 번이나 난투극을 벌였다는 소식이 있다. 한 번은 같은 반 친구를 할퀴었고 또 한 번은 식당을 가는 길에 1학년 동생이랑 시비가 붙었단다. 동생은 아들을 이로 물고 아들은 동생을 손톱으로 할퀴었단다.

상황이 그려진다. 귓불의 멍은 이 때 생긴 것이겠구나. 아이들끼리 시비가 붙었을 때 그 상황을 종결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귓불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힘으로 아이들을 제압하려면 힘이 드는데, 귓불을 잡아당기면 엉켜있던 아이들도 아픔을 참지 못해 행동을 중단하게 된다. 비록 아이들을 때리는 수준의 심한 학대는 아니라도 상황을 종결시키는 방법으로 귓불 잡아당기기를 하고 있다면 옳은 중재방법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이틀 연속이라는 것은 그만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이건 특정한 누군가의 문제가 아닌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귓불 잡아당기기 정도는 얼마든지 허용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간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다. 이런 일이. 특수학교로 전학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도 아들은 귓불에 보라색 멍이, 팔목엔 손으로 꽉 잡아 생긴 파란색 멍이 들어서 왔다. 어른의 손길에 의해 생긴 멍이다. 아이들끼리 싸우다 다쳐 오거나 물려서 오는 상처와는 양상이 다르다. 어른에 의한 멍은 안 된다. 말을 못하는 아이이기에 더더욱 안 된다.

당시 담임선생님에게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가 한동안 힘들었다.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선생님이기에 더 그랬다. 교사와 부모 간 감정 대립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참고 넘기기로 했다가 이틀 연속 멍이 들어 온 것을 보고 다음 날 일찍 학교를 찾았다.

서로 간의 대화에서 중요한 건 말의 ‘내용’이 아닌 말할 때의 ‘태도’다. 강경한 자세 일색으로 나갔다간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진다는 걸 경험한 난 이제 태도는 한껏 낮춘다. 대신 그러는 한편에도 ‘내용’은 제대로 전달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런 일 없다”고만.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진 나는 결국 독한 말을 해 버리고 만다.

“나는 선생님을 믿지 않아요. 내가 선생님이라도 그렇게 말을 할 거예요. 내가 교사고 학부모가 따지러 왔다면 당연히 학교에선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할 거예요. 그러니 나는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아요”

결론은 어떻게 났냐고? 결론 난 것은 없다. 교사는 모르는 일이고, 장애 아이들만 모인 특수학교에선 증인도 증거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큰 학대 사고도 아니고 귓불에 멍이 든 정도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사실상 없다. 그저 엄마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교사에게 알리는 정도가 최선이다.

찜찜함이 남는다. 이 찜찜함은 학교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한 말을 해 버린 나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왜 학교를, 교사를 불신하게 되었을까? 이날 “선생님을 믿지 않는다”고 했던 말에는 그동안 아들을 학교에 보내며 쌓인 나의 울분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아들이 일반학교를 다니던 1년 2개월의 동안 나는 여러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을 입에 달고 사는 ‘고개 숙인 엄마’였기 때문에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들이 3학년에 올라가고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보니 내 아들은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었고, 그 때는 그것이 부당한 일인지조차 몰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와서, 알고 나니, 화가 난다.

학부모 참관수업이나 학예회 등에서 제외되었던 일, 아들의 퇴학을 위한 교육부 진정 움직임이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일,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권고받은 일 등은 모두 아들을 위해서가 아닌 학교와 교사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학교와 교사와 일반 아이들의 편의를 위해 희생한 것은 장애인인 내 아들이었다. 내 아들이 스스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끝내는 학교까지 포기해 줌으로써 학교와 교사는 자신들의 안위를 지켰다. 그것이 이제 와 알고 나니 눈에 보인다. 화가 난다.

이런 분노가, 이런 배신감이 학교에 대한 불신을 만들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 믿겠다. 교사와 학교는 내 아이를 지켜주지 않는다.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러다 특수학교로 전학을 왔는데 귓불에 멍이 들어서 온다. 나는 어째야 할까?

이번 사건에서 처음 잘못은 담임선생님의 대응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에 의한 멍이 분명하면 적어도 그 사실은 인정하는 게 나았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 혹시 오해를 살까 봐 그럴까 했더라도 인정할 부분은 먼저 인정해야 했다. 그래야 신뢰가 생긴다.

“어른의 힘으로 귓불을 잡아당긴 게 맞네요. 저는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지만 혹시라도 누군가에 의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렇게 대응하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그러면 믿음이 갔을 텐데.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무작정 그런 일 없다고만 하고, 자면서 자국 난 것 아니냐 하고, 스스로 멍들 때까지 꼬집은 것 아니냐며 ‘회피’만 하니 불신이 더해져 갔던 것이다.

나도 잘한 게 없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열과 성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부모가 학교에 와서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 어떤 교사가 힘이 나겠는가! 아니, 교사를 할 보람이나 느껴지겠는가! 그러니 내 태도도 잘못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은 해선 안 될 말을 한 ‘진상 엄마’가 맞다.

학교와 학부모의 신뢰 관계. 참 어렵다. 아무리 좋은 학교라도 불만을 가진 부모는 있을 것이고, 아무리 성격 좋은 부모라도 학교에 참기 어려운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와 학부모는 서로를 신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서로가 편한 것은 물론 당사자인 아이도 불안감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불안감은 아이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법이다.

‘5분 대기조’라는 게 있다. 일반 부모들은 모르는 말인데, 장애 아이 엄마들 사이에서는 ‘5분 대기조’로 지내는 엄마들이 꽤 있다. 혹시 아이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뛰어가기 위해 학교 주변 5분 거리 내에서 벗어나질 않고 빙빙 도는 것이다. 아니면 본인 스스로가 실무사 자격으로 교실에 들어가 아이의 학교생활을 함께 하기도 한다.

얼핏 생각하면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좋은 엄마 같지만 사실 ‘5분 대기조’의 탄생 배경에는 학교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학교에 보내고 나면 그 때부터 아이는 아이 스스로의 세상을 살아야 한다. 학교라는 사회를 엄마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것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엄마들이 학교를 믿지 못하니 ‘5분 대기조’가 발생한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조차 편히 쉴 수 없는 엄마들도 불쌍하지만, 엄마들에게 매 순간 감시를 당하는 학교 측 입장에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학교를 믿어야 한다. 교사를 신뢰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겠다. 나의 불안감을 먼저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 일일까? 그러면 학교는 알아서 ‘신뢰’로 보답할 것인가? 내 아이를 지켜줄 것인가? 나는 어째야 할까? 장애인 아들이 커갈수록 사는 게 점점 더 만만치 않아진다.

 

/사진:류승연

 

필자소개
류승연

저서: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 (전)아시아투데이 정치부 기자. 쌍둥이 출산 후 180도 인생 역전. 엄마 노릇도 처음이지만 장애아이 엄마 노릇은 더더욱 처음. 갑작스레 속하게 된 장애인 월드. '장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에 깜놀. 워워~ 물지 않아요. 놀라지 마세요. 몰라서 그래요. 몰라서 생긴 오해는 알면 풀릴 수 있다고 믿는 1인.


섹션별 최신기사